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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14. 2024

사람들은 “미래”를 알지 못했다

아이의 미래, 우리의 현재, 나의 과거

 불과 200여년 전까지 사람들에게는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계속 반복된다고 여겼죠. 어떤 민족과 국가에게나 전성기와 쇠락기의 흥망성쇠가 이어지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롭게 한번 더 반복된다고 믿었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관은 아주 근처에 와 있습니다. 몇해 전 개봉된 마블 영화 토르 시리즈의 “라그나로크”가 그 사례죠.  영화를 보신 분은 대강의 의미를 아실 것이고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이라고 해도 이해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토르, 오딘, 로키 등등 아주 강력하고 멋진 신들 살던 세상이 한바탕 전쟁과 함께 찾아온 긴 겨울, 홍수, 가뭄 등의 재앙을 겪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봄과 함께 평화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에서 토르가 살던 고향 아스가르드가 그렇게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뒤, 지구에서의 새 삶이 시작되죠. 


 하나의 세상이 끝나고 다시 하나의 세상이 시작되는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엔 없는 북유럽 신화만의 매력입니다. 어떻게 북유럽에 살던 바이킹들은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살던 땅의 가혹한 겨울 추위, 찬란한 봄에 대한 그리움 탓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그런 믿음의 증거가 되어주었죠. 꼭 북유럽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럤습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그들의 할머니의 할머니도,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물을 기르고 나무를 해가며 살았습니다. 내 손자의 손자도, 그들의 손녀의 손녀 역시 아무리 보고 또 보아도, 농사를 짓고 물레를 돌리고 밭을 개간하고 이삭을 줍는 삶에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의 역사만 보더라도 기원전 수천년을 헤아린다지요. 한 세대가 20년을 넘지 않고 인간의 기대수명이 40세가 고작이던 시대에 수만, 수천 년 간 도무지 삶의 모습이 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이 삶이란 늘 똑같은 쳇바퀴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만 그럴까요?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매번 반복되죠. 태양과 천체의 운행도 꼭 1년마다 순환됩니다. 흑사병, 대지진, 크나큰 재난이 사람들을 덮쳐 아주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음에도 그 뒤에서 삶은 똑같은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왕조가 교체되고, 그 땅에 자리 잡고 살던 사람들이 모두 뒤바뀌었어도 삶의 모습은 같습니다. 단지 계절처럼 고난의 시기와 희망의 시기가 교차해갔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인식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구체적인 문명사적 전환이 발생하면서 차차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산업혁명이 발생하고 도시에 인구가 집중, 인류 대부분의 삶을 규정하던 농촌에서의 삶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생활환경이 마련된 1800년대 이후의 변화입니다. 이때부터는 아버지와 자식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는 이전 시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생기죠. 세계인들은 박람회장에 모여 첨단발명품과 세계의 변화된 삶을 배워갑니다. 조선시대 말엽의 사절단들은 미국 땅을 처음 밟아보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선 고층빌딩들을 보며 압도되었다고 하죠. 그런 문화적 충격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불어 닥쳤습니다.      


변화의 세기미래가 열리다


 지금의 세상은 어떨까요? 이제는 반복되는 순환이 아닌, 거스를 수 없는 변화 그 자체가 역사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폰이나 비트코인처럼 상상도 못했던 신기술이 등장해 충격적인 변화를 일으키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미래상황을 예측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이니, 아이를 기르는 일도 온통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상은커녕, 우리의 8,90년의 인생 속에서도 세상이 바뀌는 모습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니 우리가 예측하며 대비하고자하는 아이들의 미래가 정확히 들어맞기 힘들죠.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학교교육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변화 그 자체가 원인일지 모르겠습니다. 학교를 이렇게 세워서 이런 교육을 하자, 하고 건물을 짓고 교사를 양성하여 아이들을 교실에 불러 모았는데, 경제상황이나 노동상황이 사람들의 예상 밖으로 너무나 빠르게 변화해버린 것이죠. 학교부터가 변화에 뒤쳐져 있으니, 학교 교육을 따라가야 하는 가정에서는 더욱 변화를 예측하기 어렵고 따라잡기 버거워 허덕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발생합니다. 재미나게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실천을 하기보단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죠. 대표적인 게 대학입니다. 자녀를 바라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대학에 가지 않을 것이란 가정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AI와 로봇공학의 발전으로 대학에서 얻을 수 있는 직업 전문성으로는 취업이 전혀 되지 않는 시대가 이미 우리 앞에 닥쳐 있습니다. 대학 졸업장과 일치하지 않는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일치하는 사람보다 많고 대학에 가지 않고 여러 사회영역에서 자신의 적성을 발휘, 많은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은 대학에 종속된 상태이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우선 학부모님들부터가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나 대학에 안가도 된다고 말하는 학교가 있다고? 당장 우리 아이를 그 학교에서 빼내겠다고 아우성이죠. 그렇게 옮아간 학교에서 대학 중심 교육을 계속 받아, 나중에 대학 졸업장을 쓸모있게 사용하기도 어려운데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모두 변화가 당연한 것으로, 이전과 같은 삶의 방식이 앞으로도 이어질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살면서도, 막상 변화를 거부하려는 태도 또한 동시에 보이는 모순된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세상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도, 자본주의도, 언어도 생각보다 오래 살아남아 우리의 삶을 200년 전과 비슷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그대로 두더라도 변화하는 환경에는 빠르게 그에 맞추어 변화해야죠. 날씨가 추워지면 옷을 바꾸어 입고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면 그것을 배우듯이요. 

 

그러나 분명한 변화가 닥쳐오고 있음에도 거기에 발맞추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 즉,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려는 어떤 본성과 같은 것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남아있는, 역사에 대한 순환적 인식이 아닐까요?     


변하는 것과 변치않는 것들 사이미래교육은?


 역사란 순환한다는 생각은 수천 년 간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이 깨어진지는 고작 200년도 되지 않았죠. 국가와 문화, 언어가 살아남아 있으니 그 안에 담긴 사고방식도 어떤 코드가 되어 우리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노동으로 돈을 벌어 집을 산다는 생각은 200년 전 노동자들이나 지금에나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수천년간 “우리의 삶이란 변하지 않아.”라고 믿어온 사람들이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어.”라는 확신에 따른 실천을 그리 열심히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습니다. 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얻어내야 하는 상황의 연속에선,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그야말로 속 편한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죠.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장 안정적이고 확실한 길을 걸어가고, 자녀들에게도 그 길을 권하게 됩니다. 공부, 취업, 아파트 등의 공식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 혹은 미래교육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때 변화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제대로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변하고 있다고 내가 확신하고 있는 것들과, 변치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을 각각 구분하여 살피고, 그것이 참인지를 가려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가 살아갈 먼 미래를 내다보고 길고 탄탄한 길을 놓아주어야 하죠. 탄탄한 길이란 변화로 인해 유실되게 될 그런 길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요? 역사의 본질이 변화가 된지 꽤 되어서, 변화의 속도와 폭이 지나치게 빠르고 넓어졌습니다. 변하지 않을 안정된 길을 자녀의 인생 경로에 깔아주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현상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갖게 되면 그것을 돌아볼 수 있고, 제대로 된 행동을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교육 문제로 아이와 다투게 되죠. 서로에게 감정의 화살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저의 관점에서는 그런 다툼은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예측, 현재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싸움일 뿐이죠. “공부 안하면 큰일나!”라는 말이 부모님에겐 현실이지만 아이들에겐 그렇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공부 안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지금 자기들이 하는 공부를 어른들이 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알거든요. 아이들에겐 이 공부가 자신의 미래에 있어서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참으로 받아들입니다.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할까요? 아이와 마주앉아 부모님들의 과거와 현재, 생각하고 있는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아이를 설득해보고, 아이가 생각하는 현재와 미래, 부모님들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방법도 가능합니다. 당장 해결은 안될지라도 우선 강압과 저항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싹트진 않겠지요. 그리고 그런 대화를 통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아이의 미래의 삶에 대해 소통하고 아이에게 있어 그것이 참된 것인지를 끊임없이 확인하며 규명해나가는 길이 열립니다. 즉, 미래교육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고민을 아이와 실제로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죠.


 미래교육은 우리 모두에게 준비 없이 닥쳤습니다. 그래서 붕 뜨고 허황된 내용들이 판을 치고 있죠. 초등학생들에게 코딩교육을 시키는 기상천외한 일이 사교육을 중심으로 성행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코딩교육을 하면 나중에 IT 전문인력이 될 수 있을까요? 아뇨 제가 보기엔 코딩교육을 시킬 정도로 의지가 있는 부모님의 자녀들은 본격적인 입시교육에 매진하는 동안 초등학교 때 익힌 코딩 지식을 까먹게 될 소지가 큽니다. 그리고 코딩이라는 분야도 초등학생이 대학에 가는 그 시간동안 변치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죠. 끝없이 새로운 프로그램과 알고리즘이 나와 과거의 코딩 능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게 됩니다. 


 변화 그 자체를 보지 못하고 하나의 변화상에 꽂혀 안주하는 생각이 바로 미래교육의 적입니다. 미래교육은 코딩교육도 아니고 창의력교육도 아닙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본질을 간직하며 미래 사회의 변화상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앞날을 내다볼 혜안을 갖추며 올바르고 적절한 행동을 해나갈 수 있도록 아이를 기르는 것. 이쪽이 보다 나은 미래교육에 대한 정의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미래교육부터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변화와 변화 가능성이라고 하는 지점을 먼저 살펴야겠습니다. 변화를 올바르게 보는 것과 나 자신이 변화할 가능성을 키우는 것. 여기서 나와 아이의 미래의 삶의 첫걸음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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