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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07. 2020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연돈 대기 까짓거 하지 뭐!

04 : 10 : 10 : 04

"연돈?!"


 너의 그 말 한마디에 나의 인생 세번째 혹한기는 시작되었어. 그날은 우리가 2년만에 제주도에 온 날이었고, 12월의 첫 주말이었지. 불과 며칠 전에 결정하고 온 충동적인 여행이라 우리는 아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너에게 연돈을 먹게 해주고 싶었어.


 우리는 그날 밤 둘 다 10시도 되지 않아 곯아떨어졌지. 하루 전에 급히 예약한 숙소가 너에 마음에 들어서 나는 무척이나 좋았어. 그러나 깔끔하고 정갈했던 그 방이 조금은 추웠던 탓일까 우리 둘 다 마스크로 완전무장하고 제주도까지 내려오느라 조금씩 예민해진 상태였기 때문일까 피곤한 몸으로도 두시간 간격으로 세번이나 잠에서 깼지. 그때마다 너는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즉시 대답한 뒤에 다시 잠에 들었어. 그러나 세번째로 잠에서 깨었을 때는 새벽 3시 55분. 나는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지.


"가지 마 피곤하잖아 오빠도. 어딜 가 빨리 쉬어."

"아냐아냐 간다."

"지금 어딜가 얼른 누워요."

"마! 난 네가! 내가 너 먹여준다 연돈!"


 마침 숙소에서 연돈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였어. 새벽 네시의 칠흑같은 어둠 속을 나는 두려움을 갖고 달렸지.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제주도에 오면 남의 차를 빌려 타는 것이니 신이 나서는 난폭하게 운전을 하곤 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는 계속 철이 조금 더 드나봐. 2년 사이에 또릿하게 변해버린 작은 섬은 새벽에도 군데군데 그 세련되게 새단장한 모습을 드러내더군.


 더본호텔을 그대로 지나가서 연돈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 10분쯤. 연돈 앞에는 텐트가 대여섯 동 있었고 캠핑의자를 펴고 앉은 젊은 남성도 하나 보였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영하 2도였지. 아직 한참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며 다시 차에 들어가서 연돈 예약 팁을 확인했어. 차에서 조금 더 여유를 부려도 괜찮을 것 같았지. 일찍 줄 선 사람은 식사시간을 여유있게 택할 수 있고 커트라인으로 향할수록 앞사람이 선점한 시간대의 식사는 불가능해서 저녁으로 밀리거나 서너시에 식사를 하게 된다고 해. 크게 돌지 않기로 하고 잡은 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식사 예약에 묶여서 짧은 2박 3일의 여정을 여유있게 보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차에서 나가서 텐트 끝에 서기로 했지.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날 위해서. 12시에 정확하게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저...추우시면 저랑 교대로 차에 들어갔다 오실래요?"

"아뇨. 여기 있어야죠. 여기 앉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인데, 캠핑의자에 앉은 남자는 내 말을 거절하고는, 2인용 의자의 옆에 앉으라는 이상한 호의를 베풀었어. 나는 여섯시간의 대기시간을 견딜 각오를 하며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지. 폰만 있어도 글을 쓰다보면 두어시간을 훌쩍 넘길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조금도 그 시간이 걱정되진 않았어. 오히려 너와 잠시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홀가분하기도 했지. 날이 밝으면 배터리도 아낄겸 책을 볼 수도 있었을 거야.


"에헤이 앉으세요 여기."

"아...ㄱ...그럼..."


 나는 쭈글거리며 두번째 호의에 못이기는 척 수락을 했지. 서서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연돈 점포 앞 데크에 책 두권을 내 펑퍼짐한 엉덩이에 깔고 앉아서 폰으로 글을 쓸 요량이었는데, 그 남자는 의자 한쪽으로 바싹 몸을 붙여서 자리를 만들고 손짓을 하더군. 나는 다시 가방에 책을 넣고 의자에 앉으며 글은 다 썼군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털어내버렸지. 급할 건 없는 일이니까 대신 여섯시간 동안 이 남자와의 대화에 집중해야겠군, 생각을 고쳐먹었어.


"이거 드세요 제가 만든 프로틴바예요. 그리고 커피 드릴까요? 로스팅해서 가져온 거 있는데."

"네? 아아 감사합니다. 어...커피요? 네."


 남자는 이번엔 두번째 세번째 호의를 연달아 베풀었어.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새벽의 공복을 달래는 달달하고 바삭한 견과류 시리얼바를 베어물고 씹으며 남자가 차에 가서 보온병을 들고오는 것을 바라보았지. 이쯤에서 나는 남자가 수더분하면서 고지식한 무골호인인 것을 대략 알았어. 그리고 그런 예상을 그는 10시가 되기 조금 전, 연돈 사장님께서 대기인원과 메뉴를 등록받을 때까지 계속 입증을 했지. 이를테면 그 남자는 먼저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한시간쯤 내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몸을 일으키자 더본 호텔 내부 화장실의 위치와 입장방법까지 자세하게 설명을 해줬어. 성실해서 고지식해보이는 성격인데, 그런 성품이 확연히 보이며 그가 말하는 커피며 주식이며 사업이며 모두가 허언으로 들리지 않았어.


"커피 로스팅하세요? 저는 집에서 냄비로 볶는데."

"아 저는 친구가 카페를 해서 거기서 생두 값만 내고 직접 볶아요."


 나는 남자가 따라주는 커피를 받으며 친교적 목적의 발화가 아닌 정보소통의 목적을 지닌 발화로 말문을 열었지. 그는 이내 유창하게 홈로스팅 머신까지 추천해주며 커피 지식을 뽐냈어. 나는 길 위에서 좋은 스승을 만난 기분으로 즐겁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 잠시 뒤에 그는 주식에 대한 이야기도 여럿 알려주었어. 분산투자로 단타매매를 거래량을 보고 저점 매수, 고점 전 매도의 원칙으로 철저히 지키는 남자였지. 200만원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꾸준히 월 10%에 가까운 수익율을 내고 있었어. 스스로 주식공부를 꾸준히 해 수익을 내는 그에게서 학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능력과 재능을 느꼈지. 하지만 그런 그도, 초록뱀 미디어가 빅히트가 상장하면서 수혜주로 떠오르자 대주주가 대폭 주식을 정리하고 그러면서 외인이 주식을 받아먹지 않아 주가가 폭락하는 상황 같은 것을 예측하진 못한 거야. 그는 현재 -25%의 수익율이 된 초록뱀 미디어가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효과로 충분히 주가가 회복되는 시점에서 손절매를 할 거라고 하더군. 우린 그런 이야기로 날을 세웠어. 다만 우리에겐 갚아나가야 할 신혼집도, 주식보다 급한 인생의 과제들이 많아서 내가 헛바람이 들어있진 않으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리 모두 로또 한장 안사고 사는 사람들이잖아.


 동이 틀 무렵부터 나는 제자리에서 스쿼트를 하기 시작했어. BMNT(군대용어로서 해뜨는 시간을 말함)가 다가오면서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한 거야. 추위로 경직된 근육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영 불편했거든. 나는 제자리에서 맨손 스쿼트를 하며 남자와, 또 우리 아버지 뻘인 아저씨도 뒤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와도 이야기를 나눴지. 한창 성수기인 9월에 온 그 아저씨는 새벽 5시에 왔더니 커트라인을 넘어가버렸었대. 그래서 오늘은 새벽 네시에 온 거야. 다행히 나중에 아저씨는 내 뒷순번으로 7번에 이름을 쓰고 두 딸들을 나와 같은 12시 식사에 데려올 수 있었어.


 아홉시가 넘어가니 데크를 점령한 텐트에서 사람들이 완두콩처럼 목을 내밀더니 감긴 눈을 마저 뜨고 나와서 텐트를 정리했어. 보온장비만 갖추면 텐트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게 어렵진 않을 것 같았어. 화장실도 호텔더본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 샤워만 하고 나와서 먹을 것과 맥주까지 챙겨서 하는 연돈캠핑이 썩 나쁘진 않을 것 같더라구. 그래서 사람들이 기꺼이 캠핑까지 택하는 것일 거고, 캠핑 여건이 좋으니 텐트까지 치고 웨이팅을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거야.


 드디어 사장님이 나오고 나와 동갑이었던 그 남자는 인삿말도 없이 식사시간을 등록하고는 쏜살같이 사라져버렸어. 나는 그 바람에 고마웠다는 인삿말도 하지 못했지. 성실하고 재능도 있는 친구이니 앞으로도 뭘 해도 잘하길 바래. 그가 아니었다면 여섯시간의 대기시간을 나는 글을 쓰며 보낼 순 있었겠지만 조금 더 지루했을 것 같아.


 위풍당당하게 6번의 대기열에 이름과 식사시간을 적고 뿌듯한 마음으로 내 뒤에 선 사람들을 나는 바라봤어. 저들 중에 분명히 커트라인에 잘리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더욱 자신만만했던 것인지 몰라. 커트당한 사람의 억울한 표정을 보고싶긴 했지만 당장 빨리 숙소로 가야 내가 잠깐이라도 샤워를 하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어. 사실 옷을 껴입은 몸쪽은 그나마 따듯했지만 발가락은 뼈와 살이 분리된 느낌이었거든. 샤워기로 팡팡 뜨거운 물을 부어버릴 생각이었어.


 펜션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분. 그렇게 나는 너에게 달려갔고, 우린 연돈을 가기 전에 산방산 아래 카페에 들러 맑은 태양과 칼바람을 맞으며 잠깐 시간을 가졌지. 귤도 있고 네가 좋아하는 과자도 있지만 아메리카노 외엔 위장에 넣고 싶지 않었어. 나는 새벽 네시에 프로틴바를 먹고 난 공복인 그대로 12시에 연돈을 먹길 기다렸던 거야.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위장을 말끔히 비워둔 채로, 각자 말차라떼와 아메리카노로만 따듯하게 달랜 상태로 12시 정각에 대망의 연돈을 향해갔어. 뜨거운 물로 10분 넘게 샤워를 해서 내 몸은 날아갈듯 가벼웠지. 그러나 마음은 더욱 산뜻했어.


 다시 호텔더본을 지나고, 어느새 하늘을 투명한 푸른 빛으로 물들인 정오의 태양 아래 우린 연돈에 입장했지. 12시가 되기 2분 전인 58분, 카운터 직원분이 체크 전화를 걸었어. 예약인원 체크에 공을 들이는 영업방침에 우리는 함꼐 놀랐지. 그냥 예약자가 일정 시간 내에 오지 않으면 예약을 캔슬하고 현장 대기 인원을 들이는 방법도 있는데 말이야. 다행히 우리는 정확히 12시 1분에 도착했고, 드디어 연돈에 입장을 할 수 있게 된 거야.


 너는 치즈돈까스, 나는 등심돈까스에 카레는 각각 하나씩,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돈까스는 아니어도, 백종원의 가치관을 바꾸기엔 충분한 이 돈까스를. 너는 2년 전부터 꼭 먹고 싶었던 이 연돈을 먹으며 정말 즐거워했어. 그걸 보며 난, 새벽에 부르려더가 만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노래를 부르는 주접을 떨고 싶었지만 꾹 참았지. 대신에, 언제고 날씨가 풀리고 우리가 제주도에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너와 함께 전날 밤 9시쯤, 샤워까지 미리 마치고,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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