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녹두전 했는데에
- 오늘 저녁은
- 시원한 메밀국수
- 넹
언제나처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퇴근시간은 다가오고, 바깥양반은 저녁 메뉴를 뜬금없이 선언했다. 요즘 우리는 절약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외식이 아니라 이렇게 한번씩, 입에 당기는 메뉴를 이야기하는 바깥양반을 보면 뭐랄까. 귀여운 느낌이랄까. 어쨌든 퇴근하며 통화를 했다. 메밀국수. 좋긴 한데 말이야. 문제가.
"근데 메밀국수 하려면 육수 만들어야 돼."
"육수? 아냐 육수 필요없지."
"응? 무슨 소리야 메밀국수하려면 동치미랑 고기..."
"아 아니 소바 해달라구. 막국수 말고."
"...으잉?"
"여름이니까 씨원~하게 소바 먹읍시다."
으잉 시상에나. 소바를 해달란 거구나. 나는 조금 놀랐다. 소바는, 세상에, 집에서 해먹어 본 적이 없는 음식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건 아니다. 밀키드도 넘쳐나는 세상에, 가쓰오부시 들어간 메밀국수 육수가 별거랴. 하여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메밀면, 집에 있고. 무, 사야한다. 메밀국수 육수, 시판제품, 산다. 그리고...아 생와사비. 그리고...쪽파. 집에 있다. 음 생각보다 별거 아니군.
특히, 메밀면의 핵심인 소바육수가 시판육수를 하용함으로써 별거 아닌 것이 된 상황이므로 나는 그럼 곁들이로 뭐라도 만들기로 했는데 식자재매장엔 마땅한 게 없다. 새우튀김을 하고 싶지만 냉동 칵테일 새우들이 상태가 별로다. 조만간 코스트코를 가야겠구나. 나는 생각하며 장을 본 것들을 들고 집으로 향한다.
"꺄앙!"
"응 동백아 아빠왔다~. 얼른 손 씻고 안아달라고 하자."
아기가 이제는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팔짝팔짝 뛰며 만세를 부른다. 안아달라는 뜻이지. 아이가 부쩍부쩍 자라나는 것이, 정말로 하루하루 시간 가는 것이 아까울 정도다. 교사의 기쁨은 뭐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더라도 방학이란 기간이 있어어 아이와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인데, 여름을 지나고 나면 아이가 또 얼마나 커져있을지. 한달 반 정도 남은 여름방학 때까지, 내가 곁에 있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아이는 또 얼마나 자라있을지 아쉬움과 궁금함이 함께 한다. 아이와 짧은 시간 놀아준 뒤에, 이제 식사 준비 시작.
흰 메밀면이 곱게 삶아지는 것을 바라보며 무를 강판에 간다. 사각사각. 마트에서 제일 큰 놈을 집어왔더니, 옆구리가 터져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래도 강판에 갈고 나서 토막난 놈을 씹으니 제법 싱싱하니 달큰하다. 약간의 귀찮음의 문제일뿐, 영 못먹을 놈을 산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큰 무가 맛이 변하기 전에 먹으려면 뭐든 부지런히 해야하는데 뭐든. 여름이라 이제 굴을 먹을 철은 아니지만 채를 쳐서 설탕을 넉넉히 부어 무생채를 만들어두면, 더 무더워진 날씨면 열무김치에 함께 넣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좋겠다. 조만간엔 만들어먹어야지.
무를 갈고, 가쓰오부시 육수를 1:5의 분량으로 물에 희석해서...어디에 담지. 마땅하지 않다. 주전자가...에라이 커피 내리는 비커에 담자. 그리고 만두를 굽는다. 곁들이로 뭐라도 있어야 보기도 좋고 기분도 좋다. 튀기는 것은 너무 기름지니까, 넓은 후라이팬에 담아, 물을 자작하게 부워 조금 익힌 뒤 기름을 살살 뿌려, 여러번 뒤집으면서 굽는다.
면이 감겨지고, 쪽파도 다듬어내고, 거기에 와사비까지 짜서 내면, 그럭저럭 완성. 소바면으로 여름 저녁상 차리기다.
종강으로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볼 마음의 틈바구니가 열렸다. 나에게 요리란 무엇일까 고민을 하고 있노라니,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옛말이 새삼스럽다. 이렇게 먹고 살면 당연히 무지막지하게 힘들고 시간도 많이 소모된다. 사실 아무렇지 않게 글로 담아서 그렇지, 이 한끼 식사에 후라이팬, 냄비, 채반 등등 어마어마한 설거지거리들이 생긴다. 원래부터 설거지를 싫어하는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아침 저녁 두끼만 이렇게 차려먹어도 하루에 설거지가 3,40분이다. 이렇게 살아야 할까 말이지.
그러나 할 줄을 알아서도 아니고, 하는 것이 좋아서도 아니고, 그냥, 이렇게 만들고, 맛보고, 생각하는 것이, 즐겁잖아. 그리고 설거지는 그저 해야할 일이니 싫고 좋고도,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잖아.
또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니 할 줄 아는 음식은 점점 많아지고 나의 미각은 더욱 예리해져간다. 원래 비염과 축농증을 어릴 때 심하게 앓아서 냄새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맛에 대해 잘 알게 된다. 성장하고 있는 것이지. 또 내가 그것을 할 줄 알게 되니까 바깥에서 음식에 대해 평가하는 시각도 더 나아진다. 지지자, 불여호자, 호지자, 불여락자러니. 즐기고 사니. 또 채워지며 산다.
밥상이 채워지듯, 저녁시간이 채워지듯, 아이의 하루가, 아이의 두 손이, 채워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