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SBS 탈락에서 배운 것

2개는 버리고 1개는 챙겨요

by mbly
이곳에 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2005년 SBS 아나운서 공채시험. 아직도 잊히지 않는 면접관의 질문이 있습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고 당연히 물어봄직한 질문인데, 아직도 저 질문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네, 너어무 대답을 못했기 때문이에요.


면접장에 들어가기 전 대기실에는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목도 풀고 마음도 푸는 지망생들, '가갸거겨고교'를 외치면서 혀를 푸는 지망생들, 혹시 머리카락이라도 흐트러졌을까 봐 손거울을 꺼내 세심하게 살펴보는 지망생들...


대기실을 오가는 인사담당자들의 눈에 행여 어긋날까 저도 긴장감 가득 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아 그런데.. 그날 미스코리아 진 출신의 김주희 아나운서(당시에는 아나운서 지망생)가 저쪽에서부터 걸어오는데, 와.... 어쩜 그렇게 예쁘시던지요. 저는 아직 경력이 1년도 안 되었지만 어쨌든 현직 아나운서인데도, 주눅이 잔뜩 들었어요. '미스코리아는 미스코리아구나..'


당시 저는 현직 아나운서인데도 SBS 공채시험을 쳤었어요. 지역 아나운서는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이 대부분이거든요. 여하튼 현직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실에서는 정말 많이 긴장이 되더군요. 미스코리아 분을 보니까 주눅마저 들고요. 그런 상태로 면접장에 들어갔더니, 안 그래도 쿵쾅대는 심장이 더 크게 뛰고, 머리는 하얗게 되더라고요. '과연 내가 눈에 들어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죠.


한편으로는 욕심이 났습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보여줄 테다! 현직 아나운서의 역량을 보여주지!'


저는 그때 KBS 한국어 능력시험에서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KBS 공채시험을 치려면 한국어 능력시험 점수는 필수로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중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했었지요. KBS 본사에서 상도 받고, 점수 상위권자끼리 겨루는 '우리말 겨루기'라는 프로그램 섭외 제안도 왔었습니다. 1등은 아니었지만, 상위 1%에는 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게 KBS에만 해당되는 시험은 아닌 것이 우리말 실력이라는 건 아나운서에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죠. 그래서 여기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건 다른 곳에서도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어요.


그래서 처음의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딱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어요. '이미 현직에서 업무를 하고 있지만 자기 계발을 계속한다는 걸 어필해야지!' 그 예로 한국어 능력시험 점수를 말하고 싶었고요. 그래서 기-승-전-결로 대답을 머릿속에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찰나의 빠릿빠릿한 구상 덕분에..


떨어졌습니다.


면접관이 이렇게 되물었어요.


내가 뭐라고 질문했나요?



여기에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원래 아픈 기억은 감추고 싶은 법이잖아요? 하지만 말하면서 얼마나 당황했었던가 하는 건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 기승전은 했고 결이 와야 하는데.. 결이 뭐였더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절대 절대 그러지 마세요..



말을 하다 보면, 앞 뒤가 잘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날 때도 있어요. 한참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라고 상대가 대응할 때도 있지요. 혹은 내 이야기를 듣지 않은 것 마냥 딴 질문을 꺼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뭔가 좀.. 앞 뒤가 잘 들어맞게 논리적으로 말해보고 싶은데...!' 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2개는 버리고, 1개는 꼭 가지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2
+1



빼야 할 2개는, 바닥에 떨어진 자신감과욕이고요, 더해야 할 것은 논리적인 구조 공식이에요.


SBS 면접장에 미스코리아 분이 옆에 계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스스로에 대해 믿는 것을 버려서는 안 되었어요. 우열과 관계없이 저는 저만의 매력이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그 떨어진 자신감 때문에 과욕을 부려도 안되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말, 제가 뽐내고 싶은 말을 했어요. 그러니 이야기에 자꾸만 살이 붙고, 샛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자 그럼 더해야 할 논리적인 구조 공식은 뭘까요?


앞서 말씀드렸던 PREP이 가장 대표적인 논리 구성 공식입니다.


1. PREP


POINT - REASON - EXAMPLE - POINT


투자자나 바이어를 앞에 둔 회사 설명회나 제품 소개 PPT에서도 많이 이용할 수 있는 공식이에요.



핵심가치가 뭐냐, 근거가 뭐냐, 성공사례가 있냐,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취업을 위한 면접장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나의 핵심 역량,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 그 핵심역량을 통해 성공한 경험 혹은 사례, 핵심역량으로 앞으로 회사에서 어떻게 업무를 수행할 것인지 포부. 이 4가지만 들고 가도 면접장에서 절반은 성공하는 것이죠.



2. 하나의 주제 + 하나의 소재


이렇게만 들고 가셔도 좋습니다. 주제를 하나만 잡고, 그 근거인 소재도 하나만 잡는 것이죠 합니다. 다시 그 면접장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할 것 같아요. 현직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업무능력을 내세우거나, 한국어 능력 시험 점수를 이야기하면서 성실함을 보여드릴 것 같아요.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듣는 사람이 듣고 싶어 하는 것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제가 하나의 주제, 하나의 소재만 이야기했더라면.. "내가 뭘 물었죠?"라는 면접관의 따가운 말이 아직도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진 않았을 것 같네요.



3. A-B-A'


수미상관이라고 하지요. 글의 앞머리와 뒷마무리가 비슷한 내용과 형태를 지니는 구조를 말합니다.


《진달래꽃》


김소월(1925)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이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지요. 말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을 첫 문장에 제시하고 마지막에 한 번 더 강조를 해주는 것이에요. 가운데 있는 B는 PREP에서 보면 R과 E, 근거와 사례에 해당합니다. 에피소드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4. A vs. B


대조군을 설정하는 말하기 방법입니다. '~보다'라는 의미를 넣어주는 것이에요. 성장, 성과를 보여주고자 할 때는 항상 기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에 비해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눈앞에 그리듯 이야기해 주어야 인상에 남습니다. 상당히 매출이 늘었다가 아니라 매출이 전월대비 15% 상승했다고 이야기 해야 명확해지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열악한지 이런 것들도 비교, 대조군이 있어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뉴스 기사를 한번 읽어보세요. 직장인 업무 몰입도에 대한 비교 기사입니다.


한국 직장인들의 직장이나 일에 대한 몰입도는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매우 몰입하고 있다고 대답한 직장인은 17%에 불과했고, 이는 중국(53%) 인도(48%)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오히려 절반에 가까운 42%가 업무여건도 열악하고 몰입도도 낮아 마지못해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답했다. 이 같은 낮은 몰입도는 아시아 국가들 중에선 일본(50%)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반면 고성장하고 있는 중국이나 인도는 직장인들의 몰입도가 상당히 높았다. 중국에서는 몰입도가 낮아 마지못해 직장에 다니고 있는 비율이 12%, 인도에서는 16%에 불과했다.


- 한국인들, 일중독 심한데 몰입도 낮아... 타워스 왓슨, 전 세계 30개국 1605개사 조사, 내일신문 2012. 12. 27


한국 직장인들의 일 몰입도가 중국, 일본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는 내용이죠. 우리나라 직장인의 반 정도는 마지못해 직장에 다닌다는데, 중국이나 인도는 마지못해 다니는 사람은 한 두 명 정도밖에 없다는 거잖아요. 다들 신나게 일을 하는 걸로 보이네요. 이렇게 딱 비교를 해놓으니 뭔가 바꾸긴 해야겠다는 심각성이 느껴집니다.


여기서 하나 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좀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아래 글을 한 번 읽어볼게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15세 이상 전 세계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참여한 한국인 1241명의 통계를 낸 결과 겨우 12%만이 업무에 몰입하고 있다고 답했다. 69%는 업무 몰입이 (잘)되지 않는다고 응답했고, 19%는 업무 몰입이 완전히 안 된다고 답했다(해당 설문조사는 지난 6월 '2021 글로벌 직장의 실태(State of the Global Workplace: 2021 Report)' 보고서로 발간됐다).


- [MK BUSINESS STORY] [Cover Story] 짐 클리프턴 갤럽 회장, 2021.10.27


숫자에 퍼센트에 이걸 글이 아니라 말로 들어야 한다면 아주 집중해서 들어야만 숫자와 퍼센트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바꿔보면 어때요?



한국 직장인 10명 중 9명 업무에 집중 못한다는데…



어때요? 쏙 들어오죠? 듣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바꿔 말해줘야 해요.



5. WHY-WHAT-HOW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게 WHY에요. 그런데 듣는 사람은 WHAT보다 WHY를 궁금해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를 테면 채용 면접장에서의 WHAT은 너무나 명확하잖아요. "저는 이 회사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혹은 "저를 뽑아주세요, " 면접관들은 WHY가 듣고 싶어요. "왜 지원했나요? 왜 이런 경험을 했나요? 왜 우리가 당신을 뽑아야 하나요?"


'왜 현직에 있으면서도 자기 계발을 성실하게 했으며 왜 그중에서도 국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왜 아나운서의 기본이 국어공부라고 생각하는지... 아니 도대체 왜 SBS에 오려고 하는지' 당시의 저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합격수기를 읽으면서 면접에서 잘 말하는 법만 배우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제가 면접관이 되어서 지원자들을 보니 알겠더라고요. 저는 WHAT이 아니라 지원자들의 WHY가 듣고 싶었고, WHY를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달랐어요. 눈빛이 다르고, 목소리가에 담긴 진정성이 달랐습니다.




빼야 할 2가지, 바닥에 떨어진 자신감과욕.

더해야 할 1가지, 논리적인 구조 공식.


5개 중에 딱 1가지만 챙겨가도 여러분은 논리적인 스피치를 하실 수 있어요.


이렇게 여러분을 위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2005년 SBS 탈락은 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네요. 그나저나 김주희 아나운서님은 아주 잘 지내시죠?




메인 이미지 출처 : fla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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