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위한 전략
2004년 대학 졸업사진을 찍는 날, 춘천 MBC에 아나운서 시험을 보러 갔어요. 1차 면접이 아침일찍부터 시작되어서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청량리에서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집 근처 미용실 원장님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새벽부터 머리는 풍선처럼 부풀리고, 메이크업도 아주 진하게 받았지요. 카메라 빨(?)을 잘 받기 위해서 어깨에 뽕이 들어간 샛노란 재킷에 검정치마까지 이화여대 앞 의상실에서 맞춰서 준비했는데요, 새벽부터 사자머리에 진한 메이크업, 노오란 정장을 입은 사람이 짐가방을 들고 돌아다니니까, 눈길을 안 받을 수가 없었네요.
"뭐하는 사람이래?"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저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습니다.
춘천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춘천 MBC로 향했어요. 방송국이 행선지라 그런지 기사님이 "아나운서세요?"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오, 왠지 뿌듯한 느낌이 들면서 그때까지 긴장으로 굳어있었던 어깨가 조금 풀리더라고요. '그래도 아나운서 같은 분위기가 나긴 나는구나.'싶은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쑥스럽게 웃으면서 "지금 아나운서 시험 보러 가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또 기사님께서 "꼭 붙을 거예요. 내가 사람을 잘 봐요." 그러시는 거예요!
내릴 때도 "시험 잘 보세요~~"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눈물이 핑 돌만큼 어찌나 고마우시던지요. 그때는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었을 때인데, 새벽길에 엄마의 따뜻한 응원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싶었거든요. 기사님이 엄마의 마음을 담아 불어넣어 주신 것 같아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에구! 그런데 '관광'이라는 단어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습니다. 춘천이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인만큼 관련 뉴스도 많았는데요,
"춘천시 관광과는... 관광정책으로... 관광안내.."
앞에서 한 번 버벅거렸더니 뒷부분에서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어요. '광광, 강강' 발음이 엉망진창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단어가 나올 때는 음절마다 약간 길이를 다르게 해서 발음해 줘야 해요. '관광'이라면 '관'이 '광'보다 아주 약간 길게 늘여져야 받침의 ㄴ 음가도 살리고 버벅거리지 않을 수 있는데, 그때는 그걸 미처 살리지 못했지요.
여하튼 복잡해진 머리를 안고 학교로 돌아왔고, 마침 시간에 딱 맞춰서 개인 졸업사진을 찍으면서 그날의 일그러진 얼굴이 졸업앨범에 박제! 되었습니다.
그때 춘천 MBC에 합격하셨던 분은 김일중 아나운서였어요. 이후에 SBS 아나운서가 되셨다가 지금은 프리랜서 방송인이 되셨죠. "남자만 뽑을 거면서 왜 여자 지원자도 불렀대!" 하면서 애꿎은 방송국 탓을 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저는 치명적인 발음 실수 때문에 어려웠을 거고요,
나중에 면접관을 하면서 채용공고를 내려고 보니, 신입 여자 아나운서만 혹은 남자 아나운서만 필요하더라도 구분을 둬서는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애초에는 남자 아나운서만 필요했더라도 너무나 실력이 좋은 여자 지원자가 있다면 한번 더 고민을 하게 될 테고요.
춘천 MBC 합격하셨던 김일중 아나운서는 이후에 SBS에도 합격하시는 걸 보면서 그분의 매력은 뭘까 궁금해졌습니다. 당시에 '의외의 인물이 SBS에 뽑혔다, 예상 밖이었다'라는 이야기도 있었거든요. 오상진 아나운서처럼 누가 봐도 반듯하고 잘생긴 인물이 SBS와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그분의 어떤 점이 면접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여러 가지 매력이 있으시겠지만,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온 부분은 '유쾌함'이었어요. 아나운서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매력은 '신뢰'와 '호감'이거든요. 김일중 아나운서는 유쾌한 매력으로 호감면에서 굉장히 큰 점수를 얻지 않으셨을까 싶었습니다.
본인은 '머슴형 아나운서'인데, 이미 잘생긴 아나운서들은 SBS에 많이 있으니까 이번에는 참신하게 머슴형을 뽑지 않았을까 하는 말씀도 하시더라고요. 이런 말씀 자체에도 유쾌함이 잘 묻어나죠.
아나운서 시험이 아니라도 모든 면접 자리에서 혹은 비즈니스적인 만남에서 신뢰와 호감은 반드시 필요한 매력일 거예요. 논리적인 말하기, 참신한 생각 이런 이성적인 부분에서도 신뢰와 호감을 줄 수 있지만 유쾌함, 따뜻함, 긍정적인 태도 이런 감성적인 부분에서도 신뢰와 호감을 줄 수 있죠.
특히 기억이라는 것은 감정의 형태로 뇌에 저장되기 때문에 신뢰와 호감이라는 것을 어떻게 감정의 형태로 기억하게 할 것인가, 감성적인 부분에서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 고민해보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웃는 것'이 있을 수 있겠고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전략을 짜고, 연습을 해보고 몸에 익히는 것이 꼭 필요하겠죠.
춘천 MBC의 기억에서 감정을 위한 전략까지 흘러왔는데요, 혹시 제 글을 읽으면서 흥미진진했다가 안타까웠다가, 아하! 고개를 끄덕거렸다가 이렇게 감정을 따라오고 계셨을까요? 저에 대한 호감도 생기셨을까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