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아슬아슬한 숫자 위를 걷는 마음

평가표가 말해주지 않는 나의 한 해

by Hsun


빙판은 물이나 눈이 얼어 미끄럽게 변한 바닥이다.
낮에 녹았던 눈과 고인 물이 기온이 떨어지면서 다시 얼어붙을 때, 보도와 차도 위로 얇은 얼음막이 깔린다.

이 계절의 빙판은 시간과 노력이 숫자로 평가받는 시기와 겹친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고, 대입 원서를 넣어야 하고, 회사에서도 연말 성과가 정리된다.
사람이 이름보다도 점수와 등수로 줄 세워지는 계절.

빙판 위를 걸을 때 걸음은 짧아지고, 시선은 멀리보다 발밑으로 내려온다.
숫자로 평가받는 순간의 마음도 비슷하다.
성적표를 열어 보거나, 평가 등급 화면을 띄워 놓고,
'이게 진짜 나를 다 말해 주는 걸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미끄러질 것 같은 불안, 조금만 잘한 척하면 과대평가일 것 같은 두려움이 동시에 올라온다.
내가 살아낸 시간을 이 숫자로 말해도 되는 걸까.


빙판의 문제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겉으로 보기엔 매끄럽고 반짝여서 방심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점수도 그렇다.
표면에는 ‘상위 몇 %’, ‘우수’, ‘보통’ 같은 말이 반짝이지만,
그 아래에는 새벽까지 버티던 시간,

떨어지고 돌아와 혼자 울던 밤,
남들이 보지 못한 시도와 실패들이 고여 있다.


오후가 되면 햇살이 건물과 도로를 비스듬히 스친다.
아침엔 위험했던 빙판이 서서히 흐물거리기 시작한다.
얼음 위에 물이 고이고, 딱딱하던 감촉이 부드럽게 변한다.


숫자로 평가받는 시간에도 그런 햇살이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 버텨온 거 대단해.”
“나는 네가 얼마나 했는지 다 알아.”
성적표 어디에도 적히지 않는 이런 말들이
빙판 위에 뿌려진 염화칼슘이나 햇살이 되어 조금 덜 미끄럽게 만들어 준다.
세상이 주지 않는 문장을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작은 햇살.


올해는 나도 조금 다르게 해 보기로 한다.
점수와 등급을 보기 전에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도 짧게라도 고생했다고 말해 보는 것.
이 작은 말들이 줄 세우는 행렬 한가운데서도 우리가 완전히 부서지지 않게 잡아준다.


올해의 숫자가 어떻게 찍히든,
넘어지지 않고 걸어온 날들만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찍고, 옷이 젖은 채 돌아온 날들까지 합쳐서 그 모든 날이 내 삶이다.

그래서 올해는 이렇게 정리해 두려 한다.
숫자는 세상의 언어이고, 기억은 나의 언어다.
점수표가 말해 주지 않는 것까지,
나만큼은 나를 위해 끝까지 기억해 두기로 한다.

그리고 언젠가 또다시
내 시간과 노력이 숫자로 평가받는 계절이 돌아오면 빙판은 다시 얼겠지만,
햇살 역시 언제나 이 계절을 녹이러 온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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