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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Sep 11. 2021

'새벽걷기'를 시작했다

#마흔여섯 돌아보기 13.

대단한 챌린지를 마음먹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에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뿐이다. 나에게 새벽 시간은 가족의 방해없이 오롯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귀한 시간대이나, 이러다간 책상 앞 앉은뱅이 귀신마냥 죽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육아와 내 일 사이에서의 어중간한 재택근무이긴 하지만, 하루에 한 시간 쯤은 몸을 움직여 정신을 깨우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했다.


아침 5시에 집을 나서, 그렇게 무작정 걷기를 시작한지가 이제 두달 쯤 되었다. 아직 '루틴'이 되었다 선언하기는 짧은 기간이지만, 요즘들어 스스로 꽤 만족하는 일과 중 하나다. 보통은 서래섬을 몇 바퀴 돌아 집에 오면 1시간 가량이 되고, 주말은 한강을 건너 반대편 한강공원을 돌아오는 1시간 반 코스가 기도 한다. 조깅은 아니고 그냥 '걷기'이니 살빠지는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그냥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히는 정도. 그래도 평소보다 심박수가 올라가는 느낌은 꽤 생동적이다.


내가 주로 가는 반포 서래섬은 1980년대 조성된 인공섬인데, 그냥 한강공원의 포장도로를 걷는 것보다 직접 '흙'을 밟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얼마전 읽은 박완서 작가님의 책에서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 느끼기만 하면 된다'는 대목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 마음이 딱 그 심정이다.  발로 걸어다니는 평범한 일이 '이른 아침'이라는 시간대를 만나 이렇게 특별한 의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벽 시간 집을 나서기 전에는 몰랐다. 기상 시간이 전보다 더 빨라진 것도 아닌데, 창 밖으로 맞이하던 아침과 흙길을 밟고 서서 맞이하는 아침은 또 달랐다. 매일 일출 시간이 조금씩 틀린 것도, 해뜨기 직전의 하늘이 그렇게 오묘한 빛을 띄는 것도, 책상에 앉아 보던 풍경과는 다르니 참 신기한 노릇이다. 미처 들어가지 못한 어제밤 달도 가끔 만난다.


동작대교에서 서래섬으로 이어지는 길. 하늘 저 끝에 초승달.


이제 겨우 두 달이라지만, 한창 새벽걷기의 매력을 만끽하는 중이다. 그 사이 슬슬 계절도 바뀌려하여 이제는 새벽공기도 제법 차갑다. 그렇다고 아직 긴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해 진 것은 아니다. 처음 집을 나설 때는 조금 으슬으슬하여도 5분만 걸으면 이내 몸이 따뜻하게 기운이 돈다. 새벽공기가 좀 더 차게 느껴지긴 해도, 걷는 속도에 이는 바람은 놀라우리만치 기분좋은 온도다. 그 공기가 맑은 정신을 깨우기에 적당하고 부드러워서, 꼭 '비단같다'는 생각을 했다.


산책이야 모두가 퇴근한 저녁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란 것도 오늘 먹은 음식과 같아서,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생각들이 말이 되어 자꾸 수다스러워진다. 그래서 저녁 산책은 좀처럼 말없이 조용히 끝내기가 힘들고, 얘기할 상대가 없는 한밤중 혼자 걷기는 어쩐지 심심하다. 오늘의 만보걷기 목표량을 채우려 나온 듯 눈에 불을 켠 사람들도 무섭다. 


반면  다음날 눈을 떠 새벽길을 나서면 마치 새 사람이 된 듯 발걸음이 가볍다. 어제의 복잡한 생각들은 잠자는 동안에 저절로 정리되니,  참 단순한 인생이라 생각하면서도, 또 그게 나인 것을. 이른 아침은 그렇게 철저히 혼자 걸을 수있는 시간이다.


한참을 걷다가 안경에 김이 서려 코밑으로 잠깐 마스크를 내리면, 맑은 공기가 훅 하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들숨이 새벽의 살짝 강비린내따윈 전부 덮어버릴 정도로 신선하니, 흙냄새가 이렇게 상쾌했었나 싶어 마음이 쿵하고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숨쉬는 것도 잠시.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볼새라 얼른 마스크를 끌어올린다. 이런 일상이 되기 이전이라면 너무 당연했을 새벽 공기가, 산소통에 넣어 파는 알프스 무엇 마냥 귀해졌다. 오늘도 심쿵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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