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하나에 봄 한 조각
"一片花飛減却春(일편화비감각춘)
꽃잎 하나 날리어도 봄빛은 깎이는데
風飄萬點正愁人(풍표만점정수인)
바람이 만 개의 꽃잎을 떨구니 못내 시름겹다."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 두보(713년~770년)는 뛰어난 글재주와 실력에도 지독히도 관운이 없었다. 당시, 당나라의 조정은 하루가 멀다고 권력 다툼으로 날밤을 새웠다. 굶주린 백성들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참다못한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국운은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나라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두보는 나이 마흔일곱에 겨우 말단 관리직에 임명되었다. 그런 그가 혼돈 속에서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는 소리를 삼킬 뿐이다. 그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곡강(曲江)에 가서 시를 짓는 일이었다. 중국 최고의 시인 이태백과 쌍벽을 이룬 그는 곡강에서 두 편의 연작 시를 썼다. 오늘날 '曲江二首(곡강이수)'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가 그것이다.
곡강의 언덕에서 지는 꽃잎을 보면서 그는 봄날의 무상함에 잠겼다.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 깎여나가는 봄날의 조각들을 시로 읊조렸다. 꽃잎 하나 날리어도 봄빛은 깎이는데, 만 개의 꽃잎이 한꺼번에 떨어지면 얼마나 많은 봄날이 사라질까. 떨어지는 꽃잎 숫자만큼 봄날이 가는 걸 아쉬워 한 두보는 스러지는 봄을 애달파했다.
봄날 고향 마을의 강물은 따뜻하고 자애롭다. 겨우내 언 강물은 한결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결로 넘실거렸다. 손을 뻗으니 예쁜 누이의 곰살맞은 웃음처럼 화사한 봄이 한가득하다. 이맘때면 유채꽃이 활짝 핀다. 강변에는 통나무로 지은 카페가 있다. 저녁나절에 카페 창가에 앉아 향이 짙은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붉게 타는 저녁노을이 내게로 달려온다. 붉은 노을빛 강물 속으로 부지런히 자맥질하는 오리 떼를 보며 나는 가는 봄날에 시름겨웠다.
초속 5센티미터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응? 뭐가?"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말이야, 초속 5센티미터"
"아카리는 그런 걸 잘 알더라"
《초속 5센티미터(2007)》는 색과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일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분홍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소녀 아카리와 소년 타카키가 나눈 대화다. 둘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벚꽃 나무 아래를 지나는 길이다. 아카리와 타카키가 주고받는 대화 내용이지. 초속 5센티미터로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이 마치 분홍 눈처럼 보인다. 봄날의 풍경을 이보다 더 화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산책 삼아 도화동 성당에 갔다. 성모님을 경배하고 성당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벤치에 앉아 활짝 핀 라일락 꽃잎을 바라본다. 평일 한낮의 성당은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고, 고즈넉한 침묵에 싸였다. 성모님의 자애로운 미소와 향긋한 꽃향기만 가득하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성당 벤치에서 봄이 가는 소리를 듣는다. 한낮 기온이 20도에 가까워 이른 여름의 냄새를 느낀다.
돌아오는 길에 분홍 벚꽃 나무를 만났다. 시속 30킬로미터 팻말은 꽃잎 떨어지는 제한속도를 말하는 건 아니다. 초속 5센티미터로 떨어지는 꽃잎이야 한 시간을 달려도 180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서귀포에서 서울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480킬로미터이고, 벚꽃이 피는 시기는 열흘 정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하루에 48킬로미터의 속도로 벚꽃은 북상한다고 보면 된다. 그 속도를 하루 30킬로미터로 제한하면 봄날은 조금 더디 갈 것이다.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가는 봄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