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nry Apr 05. 2024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을왕리 해변의 아침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긴 겨울을 이기고 생명이 움트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말은 겨우내 움츠리고 숨죽였던 만물이 새 생명을 잉태하는 4월과는 거꾸로 인간의 내면은 철저하게 고독하다는 것을 뜻한다. 역동하는 계절과 달리 마음은 움츠러들고, 현실은 무척이나 고독하다. 역설, 비유, 그리고 상징의 아름다움이 이 한 문장에 담겼다.  


내가 한 말은 당연히 아니다. 문장이 빈약한 내가 어떻게 이런 멋진 말을 생각할 수 있을까. 유식한 척 폼 잡을 때나 쓰는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냐?'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 내 처지에 딱 알맞다. 미국의 유명 시인 T.S. 엘리엇이 쓴 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문장이다. "죽음의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4월이 인간을 고독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다. 


나의 4월이 딱 그러하다. 되는 일도 없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 우울한 현실이 생명이 넘치는 4월과 너무 대비된다. 움이 트고 꽃이 피는 4월의 찬란함과 그 이면에 자리한 인간의 고독을 절묘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은 4월이 오면 늘 역설의 아름다움으로 넘치는 이 문장을 읊조린다. 올해도 나는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그렇게 이 말을 되뇐다. 


그래, 맞다. 지금 내가 맞이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온 산에 진달래꽃이 흐드러진 4월이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은 혼돈에 빠졌다. 더 고독해졌고, 더 우울해졌고, 기댈 곳 없는 곤궁한 형편에 앙가슴만 두드린다. 꼭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이 본질적으로 외롭고 고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화려한 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계절에 나는 짙은 무채색의 고독에 빠진다. 


서해 을왕리 바닷가에 왔다. 인천국제공항이 자리한 영종도의 끝자락에 을왕리가 있다. 왕자의 묘가 있었다는 전설 탓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바닷가 기슭의 야트막한 산에는 하얀 벚꽃과 분홍색의 진달래꽃이 4월의 봄을 자랑한다. 남도는 봄이 완연하지만, 서해의 바람은 아직 차다. 바닷바람은 여물지 못한 어린 고양이 발톱을 닮았다. 그리 날카롭지 않은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기분 나쁘지 않은 새초롬한 차가움이 좋다. 


카페 주인이 영업을 시작하기에 이른 시간이다. 편의점에 들러 '커피의 부인 예가체프'를 샀다. 인적 뜸한 해변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철 이른 해변의 아침은 쓸쓸하고 고독하다. 밤새 잠을 뒤척인 바다는 새벽녘에야 잠들었나 보다. 해안선을 한 뼘도 넘게 뒤로 물리고 선 바다는 단잠에 빠졌다. 흐린 회색의 하늘과 짙푸른 바다, 이럴 때면 나는 먼 이국의 바다에 있는 에뜨랑제의 기분을 느낀다. 


시간은 참 빠르다. 4월 5일, 2024년도 석 달이 지났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담벼락에도 노란 개나리꽃이 활짝 폈다. 황금색을 흩뿌리는 봄바람은 훈훈하고, 한낮의 햇살은 이내 모난 송곳처럼 따끔거릴 것이다. 봄을 채 즐기기도 전에 여름이 성큼 올지도 모른다. 어느 때부터인가 봄과 가을은 한참 짧아졌고, 그만큼 여름과 겨울은 길어졌다. 사계절이 뚜렷한 금수강산이라는 말도 노랫가락에만 남았다. 


그렇게 4월이 가고 나면, 앞으로 다가올 봄은 얼마나 될까. 더디 왔다가 쉬 가는 게 계절이고 보면, 그만큼 남은 삶은 짧아진다. 해야 할 일이 많고, 남은 것이 많으면 뒤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건 젊을 때 이야기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남은 시간이 짧아지면 자주 뒤를 돌아본다. 괜스레 회한이 많아지고,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오는 감정 말이다. 이렇게 살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로 다짐했다. 아름다운 해변의 근사한 별장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향이 짙은 커피를 마시겠지, 그런 상상을 했다. 지금쯤이면,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붉은 와인을 마셔야 한다. 벚꽃 지는 밤에는 첼로 선율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깨고 보니, '한여름 밤의 꿈'이다. 지금 나는 성냥갑 닮은 아파트 숲에 살고 있다. 자주 회색빛 빌딩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최근 몇 주 동안 정신없이 보냈다. 지상파 생방송에 출연하고, 신문사에서 요청한 글도 실렸다. 그리고 벌여 놓은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뒤를 돌아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무얼 그리 큰 꿈이 있다고 이리도 바쁘게 지낼까. 그냥저냥 살아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가는 걸. 중뿔나게 잘 난 것도 없으면서 그리 바쁘게 지난다고 뭐가 남는 게 있나. 그 말도 맞다. 그렇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다. 달팽이는 후진을 모르고, 오직 직진 본능만 가졌다.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가는 달팽이를 닮고 싶다.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라일락,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꽃이 화려한 색의 향연을 펼칠 것이다. 이토록 생명이 넘치는 계절이 또 어디 있을까. 내년 또 후 내년에도 어김없이 봄은 돌아올 것이다. 자연은 저리도 무한한데, 우리 삶은 너무 짧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엘리엇의 말이 어찌 가슴에 와닿지 않겠는가. 혼돈의 시간을 지나면, 서로 다른 모습의 4월을 맞을 것이다. 어떤 이는 잔인한 시간을, 어떤 이는 행복한 시간을.





이전 01화 다크 초콜릿 같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