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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Apr 20. 2024

세 번째는 아니 만나야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7살의 봄, 피천득은 일본에서 머물렀다. 그때 초등학교 1학년인 아사코를 처음 만났다. 어린 아사코는 피천득을 오빠처럼 잘 따랐다.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그의 목을 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사코는 쓰던 작은 손수건과 끼던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난 어느 해 사월 피천득은 도쿄에 갔다.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된 영문과 3학년 여대생이 된 아사코를 다시 만났다. 그는 아사코와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여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이야기한 것 같다고 회상한다. 


또 십여 년이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아사코를 만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에 백합 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을 봤다. 일본인 2세인 미국 국적을 가진 장교와 결혼한 아사코와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피천득은 “백합 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를 보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까닭을 짐작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그의 깊은 속내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너무 변해버린 아사코의 모습에 마음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든 모습의 그녀라도 만났으니, 미련마저 잘라낼 수 있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지워지지 않는 시절이 있다. 아득해진 기억이 되살아나면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때가 황금시대였고, 설레고 그리운 시간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그저 추억으로 반추할 뿐이다. 어제는 한참 시간이 흘러 그네를 찾아온 옛 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만날 사람은 꼭 만난다.'는 주술에 매달린다. 


우연히 길모퉁이에서 옛사랑을 만나면 어떤 마음일까. 데면데면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터지려는 울음을 꾹꾹 삼키며 겨우 다잡은 마음이 몇 날이기에 그리 쉽게 잊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빛나던 청춘이 사라진 지야 한참이고, 어느덧 귀밑 흰 눈이 소복이 쌓였을지도 모른다. 눈가에 잔주름이 하마 잡혔다고 못 알아볼 리는 없으니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백합 같이 시들었으면 또 어떤가. 


"세 번째는 아니 만나야 좋았을 것"이라는 피천득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뿐이다. 행여 남은 인연이 있다면 이생에서 꼭 한 번이라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사는 사람도 많다. 우연히 조우하는 행운이 있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그때 왜 그랬는지, 지금은 달라졌다는 시답잖은 변명이라고 하고픈 걸까. 저마다 가슴속에 묻어둔 하나쯤 사연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게 인생이라 애써 위안하며 그렇게 무심하게 살아간다. 


오늘은 친구가 천 리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다. 그를 반가이 맞는 또 다른 친구들이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모처럼 모여 소박한 향연을 펼친다. 비 오는 날 당기는 파전을 앞에 두고, 반가움의 잔을 돌릴 것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도 더 들었던 그 시절의 썰을 풀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구 하나 지겹다고 하지 않고 박장대소를 터트린다. 술잔을 든 그들의 가슴팍에는 추억이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렸을 것이다. 


토요일 늦게까지 강의가 있다. 마치고 가면 너무 늦은 시간이다. 천 리 길은 아니라 해도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몇 줄의 글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까만, 다음을 기약한다. 한 달이 될지, 아니면 두 달이 될지 알 수 없다. 애면글면 그렇게 속 끓이던 그 시절의 그들을 어찌 잊겠는가. 그건 세 번째는 아니 만나도 좋을 그런 인연은 아니다. 


오늘 밤늦게 홀로 붉은 와인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낮은 빗소리와 함께 꽃 지는 소리를 들어야겠다. 낙조처럼 일렁이는 술잔 속으로 떨어지는 꽃잎과 추억을 버무려 마실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면 열정도 식고 재만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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