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
“사람들은 우리를 못 끌어내려 안달하지.
우리가 너무 몰려다녀서 그렇다고 해.
그렇게 말하는 꼰대들은 얼마나 쌀쌀맞게 보이는지.
난 늙기 전에 죽고 싶어.
꼰대들 그냥 꺼져버렸으면 좋겠어.”
영국의 전설적 Rock 그룹 더 후(The Who)가 1965년에 발표한 ‘My Generation(우리 세대)’에 나오는 가사 일부야. 이걸 내 나름대로 의역해 봤어. 이 노래는 하드 록과 펑크 록의 시초로 일컬어지지. 더 후는 무대 위에서 화끈한 사운드와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젊은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 특히 "늙기 전에 죽고 싶어(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라는 가사는 젊은이들의 정신을 상징했어.
“서른이 넘은 사람을 믿지 마라(Don't Trust over Thirty)”는 말은 더 후의 'My Generation' 속의 가사와 함께 1960년대 청춘들의 슬로건이었다. 그 시기는 젊은이들은 지금과 다른 이유로 방황했어. 베트남 전쟁, 인종 차별, 여성 권리 운동, 핵무기 개발 경쟁 등 세기적 두려움과 불안감이 판치던 것이 바로 이때야.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정치적 선택을 강하게 비판하고 반항했어.
이렇게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저항했던 그들은 지금 70대가 넘어 80대가 되었다. “늙기 전에 죽겠다”라고 노래했던 더 후의 멤버 중 두 명은 세상을 떠났지만, 나머지 두 명은 70대 후반과 80대 초반의 나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또 다른 누군가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그런 대상이 되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어느 시대나 존재하고, 내용이야 다르지만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아.
나이 듦을 애달파한 시와 노래가 얼마나 많은가. 나이 드는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젊음이 오래가길 원한다. 맑은 정신과 윤기 있는 피부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의느님'의 힘을 빌리면 영원까지는 아니라도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몇 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노화를 더디게 할 뿐이다.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
괴테가 쓴 불후의 명작 <파우스트>에 이 상황을 잘 이야기한다. 노학자 파우스트, 그는 젊은 시절 학문에 정진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철학·법학·의학·신학을 포함해 모든 학문을 섭렵했다. 말년이 되자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하고 우울해졌다. 그는 학문적인 성취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과 한계, 도덕적 고뇌를 성찰하기 위해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젊음을 되찾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맡기는 거래를 한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는 악마의 뜻과 달리 신의 구원을 받는다. 천사들은 "구원받은 자는 누구나 구원을 줄 수 있다"라고 선언한다. 끊임없이 삶의 본질을 추구한 파우스트는 결국 깨달음을 얻고, 그는 신의 구원을 받았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간의 끊임없는 추구, 헌신, 그리고 성찰이 결국 영적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지만, 정작 그걸 추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학자인 파우스트조차 노년의 허무함을 극도의 감각적 쾌락과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가 그럴 정도인데 보통 사람들은 오죽할까.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기력이 떨어지면, 문득 자신이 살아온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렇다고 단지 몸만 젊어진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인 노화야 늦출 수 있지만, 마음의 노화를 막을 방법이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는 횟수가 많아진다. 그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내 인생이 분명 달려졌을 거야. 지금 내가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더 행복했을 거야. 그렇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 아쉬움에 젖는다. 돌아갈 수 있다면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의미 없는 다짐을 해본다. 자기가 걸어온 길은 늘 모자란 듯하고, 가지 않은 길이 더 멋있게 보이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 보다.
40대가 되었든, 50대가 되었든, 60대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자기 노력이다. 더 높은 이상과 더 큰 선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 있다면 그깟 나이가 대술까. 영혼은 싱싱한 젊음을 유지할 것이다. ‘나이 듦의 미학’을 말하는 것도 맹목적인 ‘청춘 예찬’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얼까. 최선을 다해 추구할 것이 무엇일까. 그걸 아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