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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May 10. 2024

묘비명(Epitaph)


집에서 30분 거리에 산이 있다. 산이라 해봤자 겨우 200미터 남짓하지만, 숲이 꽤 울창해서 자주 찾는다. 산에서 내려다보면 가족 공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직사각형의 묘비의 비석이 오후의 햇살에 반짝인다. 이들은 똑같은 키로 나란히 열병식을 벌인다. 누군가 놓고 간 시든 국화가 쓸쓸하다.


묘비마다 주인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한 평 남짓한 자리에 누웠다. 모두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이는 부귀와 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다른 이는 질곡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생전의 영광과 부귀가 태산을 이루었다 해도 이곳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같은 크기의 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산다는 게 무얼까 하는 생각에 숙연해진다.


누구의 삶도 항상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었다. 각자 고만고만한 슬픔과 상처도 간직하고 살았다. 어느 고통이 덜하고 더할 것도 없다. 아픔 없는 삶은 없고 눈물겹지 않은 생도 없다. 때론 기쁘고, 가끔은 슬픈 그런 삶을 살았다. 이제 각자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뒤로 한 채 양지바른 공원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공원 왼쪽으로 들어서면 외국인 묘지가 있다. 그중 유별나게 눈에 띄는 묘비가 하나 있다. 약 120년 전에 제물포에서 죽은 캐나다인 프랭크 리치먼드의 무덤이 그것이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가 겨우 23세였다. 그에게는 만삭인 아내와 아이 2명이 있었다고 묘비명은 말한다. 스물세 살의 이국의 젊은이가 제물포에서 잠들었다. 남은 가족의 삶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아무도 찾는 이 없는 그의 무덤이 무척 아리다.   


“우리는 항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라고 신학자 칼뱅이 말했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말한 사람은 철학자 하이데거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한발 한 발 내디딘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며칠 전 가까운 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삶이 얼마나 신산했는지 잘 안다. 평생을 숨죽이며 가슴앓이하다 떠난 그녀를 생각하면 참 슬프다. 평소 눈물과 거리가 한참이나 먼 나도 그녀가 떠나는 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원망도 솟구쳤다. 어찌 이리 슬픈 삶도 있을까. 끝내 죽어 한 줌의 재로 변한 삶의 기구함이 못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비석도 없고, 묘비명도 남기지 않고 떠난 이를 생각하면서 킹 크림슨의 "묘비명(Epitaph)"을 듣는다. 무척 오래전에 나온 노래다. 노랫말은 소소한 개인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큰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노래한다. 슬픈 멜로디가 오늘 같은 저녁에 알맞다. 떠난 이를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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