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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Jul 12. 2024

외로움의 사회학


우리는 언제 외로움을 느낄까?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고립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 사람은 많지만, 정작 나를 다독이고, 공감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외로움을 느낀다. 힘든 일이 있거나 우울할 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어떤 생각이 날까.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은 이미 오래전에 이런 현상을 “고독한 군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정작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해 줄 사람을 찾기 어려운 상황을 "고독한 군중"이라고 표현했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진정한 연결과 공감을 느끼지 못해 고립감을 느끼는 현대인들을 말한다.      


독일 출신의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3)는 꽤 오래전에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해 설명했다. 고독은 자발적으로 선택된 상태로, 개인이 자기 내면과 대면하며 사유하는 긍정적인 상태로 보았다. 반면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인간 존재의 불안과 소외감을 뜻한다. 내가 힘들고 지칠 때 나를 알아주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감정을 한나 아렌트는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감정’이라고 말했다.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느낌의 끔찍함이 어떤지 상상이 가는가. 그건 바로 지독한 외로움이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Noreena Hertz, 1967~)는 21세기를 '외로운 세기'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끼고 외로움에 젖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제 외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되었다. 영국은 2018년 1월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설치했고, 일본은 2021년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다. 우울증, 외로움, 분노 같은 마음의 상태를 개인한테만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하고 정부 부서를 만든다고 개인이 느끼는 외로움이 해소될지 의문이다. 중년은 중년대로, 노년은 노년대로 각기 다른 이유로 외로움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청년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더 안쓰럽다. 청년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암울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이라 이건 쉽게 해소될 감정의 문제는 아니다. 그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미래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 


왜 청년들은 도움받을 사람이 없고,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정작 힘들 때 필요한 사람이 없다고 느낄까. 어느 세대보다 활발하게 네트워크를 만들고, 사람과의 관계를 이룬 그들이 정작 가장 외롭다는 것이 모순이다. 이유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자가 거의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남겨주지 않는 세상은 불안하다. 이런 세상에서 경쟁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삶의 근간을 흔드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흔히 우리 사회를 능력 중심의 사회라 부른다. 능력이 있으면 삶이 나아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모두 열심히 노력한다. 그렇지만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능력”이고, “부잣집에서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라 치부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발선이 다른 환경조차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능력을 제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기댈 언덕이 많지 않다.     


하버드 대학의 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Joseph Sandel)은 『공정하다는 착각』(와이즈베리, 2020)에서 “능력만 있으면 성공한다는 신화는 능력주의를 맹신하게 만든다.”라고 지적했다. 샌델은 능력만으로 개인을 재단하는 능력 제일주의의 신화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는 지금처럼 능력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모든 성공과 실패를 오직 개인의 능력만으로 판정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거나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 되는 사회가 공정하냐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출발선은 부잣집 아이들보다 한참이나 뒤처진다. 그런 사정은 온데간데없고, 결과만 보고 능력이 없는 아이로 낙인을 찍는다. 운이 좋아 부잣집에서 태어나 조기 교육을 받고, 좋은 스펙을 쌓은 것도 능력이 되는 세상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저만치 앞서 출발하고,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다. 부모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고 성공한 사람을 탓할 수는 없다. 다만, 경쟁에서 탈락하는 청년을 보듬을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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