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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Jul 26. 2024

심장이 뜯겨나가 본 사람 앞에서


심장이 뜯겨나가 본 사람 앞에서

“누구나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제일 아플 수 있어. 근데 심장이 뜯겨나가 본 사람 앞에서 아프다 소리는 말아야지. 그건 부끄러움의 문제거든”


이 말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미군 장교 유진 초이가 한 말이다. <미스터 션사인>은 2018년 7월에서 9월까지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로, 구한말 역사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지만, 무너지는 조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의병들의 이야기다. 찢어지게 가난한 노비의 자식으로 조선에서 목숨 부지할 방도가 없었던 한 아이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 서슬 퍼런 미군 장교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당시 미국은 낯선 조선인 아이에게 절대 친절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아이의 신산한 삶은 고단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조선에서 노비의 신분이고, 미국에서도 아무도 돌보지 않은 낯선 동양인 꼬마였다. 그런 그가 최유진이라는 이름 대신, 유진 초이라는 이름으로 미군 장교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가 내뱉은 말이니까 그의 절절한 삶의 궤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유진 초이의 이 말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심장이 뜯겨나간 본 사람의 아픔'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진짜 제 손톱 밑에 가시가 살을 깊숙이 파고들어 극심한 고통을 준다면, 다른 사람의 심장이 찢겨나가는 아픔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픔을 숫자로 표시해 비교한다면 달라질까? 심장이 뜯겨나가는 고통이 당사자에게 100이 아니라 1,000이라고 해도 내 것은 아니다. 겨우 10밖에 안 되는 내 고통이 늘 먼저다. 아픈 자신보다 상대의 아픔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다. 


나는 예전에 너보다 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래 네가 겪고 있는 아픔과 슬픔을 충분히 이해한다. 사실 나는 예전에 너보다 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런데 강한 마음을 먹고 노력해 그걸 극복했다."


지금 아픔을 느끼거나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이런 말이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는 이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공감하며 위로를 전하고 싶을 것이다. 아쉽게도 듣는 사람은 위안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자기가 더 큰 아픔을 겪었는데, 그걸 극복했다는 말은 듣는 이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마치 슬픔의 크기를 비교하며, "네 슬픔은 그리 심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아픔은 오롯이 자기만의 것이다. 아무리 비슷한 사고를 당하고, 비슷한 고통을 겪더라도, 그것은 각자의 것이다.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맞는다.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은 지금 아픔을 겪는 사람이 아니다. 옛날 자기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하면, 아픈 사람에게 위로는커녕 자칫하다가는 "꼰대" 소리나 듣기 쉽다.


모든 아픔과 슬픔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것이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는 삶의 근간을 흔드는 시련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스쳐 가는 고통일 수도 있다. 그것을 등급으로 나누고 크기를 계량화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현실을 가장 심각한 것으로 인식한다. 이 말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100% 공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잘 나타낸다. 


승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패자는 갖지 못하는 경쟁사회의 모습이다. 능력이 제일이고, 능력만큼은 공정하다는 메시지를 가장 충실히 학습한 세대가 지금의 청년세대이다. 이들은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기 능력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그리 큰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을 일찍부터 포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지 못한다면 사회에서 도태된다고 믿는다. 경쟁에서 밀려나면 그만큼 절실하게 노력하지 않은 탓이고, 자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열심히 노력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업할 수는 없다. 자리는 부족하고, 경쟁자는 많다. 어떤 사회든 승자 그룹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능력자로 인정받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인정하자. 그렇지만,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처음부터 공정한 출발선에서 있지 않고, 저만치 앞서갔다면 어떤가. 능력 제일주의의 신화가 과연 공정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

부모를 잘 만나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것이 현실이고, 이미 사회의 지배적 질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도 숨 쉬고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과거의 신분제는 폐지된 지 오래지만, 경제적 신분 질서는 더욱 엄격해졌다. 누군가는 부모가 만들어준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저 높은 곳에 자리를 차지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엘리베이터는커녕 사다리조차 사라졌다.


사람들은 위를 쳐다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라고 한다. 내 자리가 바닥이라 내려다볼 아래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젊고 활력이 넘쳐야 하는 청년들이 외로워하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다. 어느 세대보다 활발하게 SNS 활동도 동호회 활동을 한다. 온라인상에서나 오프라인 모임에서 그들은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웃고 떠든다. 그런 그들 중에서 의외로 외로움에 떠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군종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이 청년들이다.


옛날에는 하다못해 동네마다 빵집을 열고, 구멍가게만 해도 먹고살 수 있었다. 경제는 성장하고 일자리는 넘쳐났다. 대기업은 해마다 엄청난 숫자의 신규 직원을 채용했다. 그런 시절에서는 조금 방황하고, 조금 게을러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덜 경쟁적이고, 승자만큼 아니래도 패자도 전리품을 챙길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한가한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약한 둑은 무너졌고, 연약한 고리는 끊어졌다. 그 자리를 대기업이 차지하고 프랜차이즈 기업이 집어삼켰다. 네트워크 기술로 무장한 일등 플랫폼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시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수많은 경쟁자를 산업에서 추방했다.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던 수많은 일터가 사라졌다. 그 결과, 청년들이 들어갈 자리는 더 비좁고, 더 치열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아프고 외로운 것이다. 


사만다, 그녀가 필요해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은 대화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은둔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 처음에는 남에게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무척 어렵다. 누군가 믿을 만한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에게 마음속 아픔을 하나씩 털어놓아야 한다.


청년들은 가장 가까운 부모나 형제에게 속 마음을 이야기하면 좋다. 그런데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어렵다. 가까운 이들은 아픔에 빠진 사람을 제대로 위로하는 방법을 모른다. 충고가 엇나가면 훈계가 되고, 조언이 잘못되면 잔소리가 된다. 가장 잘 이해해 주고 보듬어 줄 가족이 가장 힘든 대화 상대라는 점은 무척이나 역설적이다.


잘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남의 아픔과 슬픔을 같이 공유하다 보면 감정도 전염된다. 그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들어주는 사람도 함께 스트레스를 겪게 되는 셈이다. 그들의 우울한 감정을 듣다 보면, 듣는 이도 어느새 우울함에 물들고 지친다. 가까운 이들은 더 빨리, 더 쉽게 지친다. 끝내 더 크게 실망하고, 관계는 더 악화할 위험성이 크다.  


소통의 부재와 오르지 못할 나무 때문에 속 앓는 사람은 청년들만이 아니다. 중년도, 장년도, 또 노년도 팍팍한 삶의 무게 때문에 심란하다. 나이가 들수록 하소연할 데가 줄어든다. 지금은 소통의 부재 속에서 외로워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현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독한 군중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이해해 줄 사람을 갈구한다. 내 말을 진심으로 끝까지 들어주고, 한결 같이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 절실하다. 세상의 외로운 이들에게는 아름다운 그녀, 사만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Her>에서 나오는 여인 말이다. 총명하고, 이지적이며, 자상한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편으로 넘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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