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떠날 줄 알고
시간은 비울 줄 알지만
가진 것 몇 안 되는 나는
마음을 비우지도 못하고
밤새 비가 왔나?
잿빛 구름 나지막이 내려오고
제법 서늘해진 바람은
퇴각하는 여름 소식 전하고
여남은 한낮의 더위를 생각하며
긴소매 옷을 꺼내 입어야 하나
학교 오는 길에 지나는
텃밭 즐비한 작은 산길에는
어느새 가을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들꽃으로 여름과의 경계를 삼지
며칠 전
사놓은 핸드드립 커피 머신에
원두를 듬뿍 넣어 내린
진한 커피 향을 음미하며
떠나려는 여름과 작별 인사를 나누지
어제 내린 비 탓에
날이 잔뜩 흐린 오늘은
불빛 희미한 선술집 모서리에 앉자
말라비틀어진 북어포를 찢어
시린 소주를 마시며
떠가는 여름과 작별하고
오는 가을을 환영하면 좋을 텐데
계절은 떠날 줄 알고
시간은 비울 줄 알지만
가진 것 몇 안 되는 나는
마음을 비우지도 못하고
속만 끓이고 살지.
비워야 하는데
버려야 하는데
비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쌓기만 해.
살아온 시간이 늘면
함께하는 물건들도 늘어.
자잘한 것들을 모으다 보니
집안은 어느새 그들 차지가 됐어.
필요해서 장만했다
쓰임새가 다한 것들이
한쪽 귀퉁이에 버려지고
차곡차곡 쌓인 물건들로
집안은 점점 비좁아졌어.
사람도 쓰임을 다 하면
구석방으로 밀려날까
그런 안쓰러움과 애잔한 탓일까
그들과의 작별이 어려워.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애매한 것들
손때 묻어 아쉽고
지난 세월을 버리는
아픔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당 넓은 집이라면 그래도 좋아.
창고라도 지어 그곳에 넣어둘 수 있고
이곳저곳 쟁여두고
보고 싶을 때 꺼내 볼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도시 생활은
처치 곤란한 물건으로 난감해.
집이 넓다고 하지만
아파트 공간은 한정이 있고
물건을 놓아두면 금방 꽉 차 버리지.
가끔 버리기도 하지만
어느새 버린 것보다 더 쌓여.
한 평이 금싸라기보다
비싼 아파트 시세를 생각하니
그 공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애물단지야.
마음에도 쓸데없는 물건이 가득하고
기억 창고에는 잡동사니가 걸리적거려
성현의 말씀으로 채우려 해도
욕망이 먼저 똬리를 틀고 앉았어.
좋은 설법을 들어도
훌륭한 말씀을 들어도
빈자리를 찾지 못한
설법과 말씀이 왔다가 돌아갔어.
비우면 비울수록
들어올 여유가 있을 텐데
욕심의 찌꺼기들만 가득하고
비운다, 비운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 생각이 짧은 탓이니
누굴 원망하랴.
마음도 가끔은 대청소가 필요해.
탐욕을 걷어 내고
욕심을 지우고
덕지덕지 묵은 때를 벗기고
한 뼘 넘은 여백이라도 있어야
맑은 생각이 먼 길 가다
지치면 들어와 쉴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