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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Sep 11. 2023

물색없는 동해와 노을 붉은 변산

【빛의 인문학 9】


바닷물에 무슨 색이 있을까

동해의 코발트블루

변산의 붉은 노을

빛이 만든 작품이야



https://www.jejuilbo.net/news/userArticlePhoto.html


동해는 왜 물색이 없을까

물색없는 바다를 보러 가는 더운 8월의 어느 날,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어. 광명역까지 건물과 건물이 어깨를 맞대고, 거대한 빌딩들이 연이어 서 있어. 서울이라는 회색 도시의 그림자가 멀리까지 뻗었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너나없이 앞다투어 복잡한 이곳으로 몰려와.


열차는 광명역에 들러 급히 사람을 태우고, 광폭한 8월의 햇살 속으로 내달렸어. 차창으로 햇살이 부딪히고, 부서진 빛의 조각들은 초록 나뭇잎으로 쏟아졌어. 산과 들판은 온통 초록 물결이 넘실거리지. 깊은 내륙에 펼쳐진 초록 바다의 풍경이 좋았어. 


들과 산은 스치듯 빠르게 지나고, 몇 번의 터널과 몇 개의 강을 건넜어. 도시를 여남은 번 가로지른 열차는 목적지에 도착했어. 가쁜 숨을 내쉬는 열차에서 내리니, 도시는 뜨거운 햇살을 데리고 마중 나왔어. 더운 햇살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한결 견딜만했어. 급한 대로 짐을 정리하고 바다를 보러 갔지.


바다는 물색(物色)이 없어. 바닷물을 손에 담으면 쪽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에메랄드 바다도, 울트라마린의 바다도 보이지 않고, 투명한 물만 손안에 가득해. 저렇게 짙은 바다색이 사라진 것을 보니 물색이 없긴 해. 바다의 색은 빛의 색이야. 빛이 바닷물 속으로 낙하하면서 만든 색이야. 


흩어지는 하늘색과 반사하는 물색

빛이 대기 중으로 들어오면 파장이 짧은 파란색이 먼저 산란해. 짧은 파장의 파란색 빛이 먼지나 입자와 부딪혀 흩어지는 바람에 하늘이 파랗게 물드는 거야. 반대로 빛이 바닷물 속으로 들어갈 때는 파장이 긴 빨간색을 포함한 긴 파장의 색은 물에 흡수돼. 흡수되지 않고 남은 파란색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바다색은 파란색이 되는 거야. 


파장이 긴 빨간색 빛은 에너지가 비교적 낮아 물 분자에 의해 쉽게 흡수되는 성질을 갖고 있어. 수심 30미터 깊이로 내려가면 붉은빛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지. 대신, 파장이 짧은 파란색은 바닷물에 흡수되지 않고 반사되어 파란 물색을 만들어.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파란 멍이 드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파랑에도 청록색이나 옅은 하늘색처럼 파장이 긴 것이 있는가 하면, 코발트블루나 인디고블루처럼 파장이 짧은 것도 있어. 얕은 바다에서는 청록색이나 하늘색과 같은 긴 파장의 파란색이 잘 반사돼. 그래서 물이 푸르스름하게 보일 수 있어. 바다가 깊어질수록 긴 파장의 빛은 모두 사라지고, 짧은 파장의 짙은 파란색만 남아 반사되지. 그래서 2,000m에서 3,000m의 수심 깊은 동해는 검푸른 빛을 보이는 거야.


에메랄드색 바다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 바닷속 식물성 플랑크톤에 부딪힌 빛이 만들어내는 색이야. 식물성 플랑크톤의 색소는 빛을 만나 갈색이나 적갈색의 바다를 만들기도 해.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초록색과 파란색이 적절히 섞여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들어. 바닷속의 산호초가 햇빛을 받아 갈색, 적갈색, 초록색의 다양한 바다 색상을 만들기 때문이야. 바다는 물색이 없지만, 햇빛 덕분에 아름다운 색을 띠고 있어. 


변산의 노을은 왜 붉을까

태양을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하면 대기 중의 입자들과 만나게 돼. 가시광선보다도 짧은 파장을 갖는 자외선은 오존층에서 대부분이 흡수되지. 자외선 일부와 가시광선, 적외선은 대기로 진입해. 가시광선 중에서 파장이 짧은 파란색 빛이 공기층의 작은 입자에 부딪혀 산란해. 파장이 짧은 빛은 대기 중에서 흩어져. 반면, 파장이 긴 빨간색 빛은 산란이 덜 발생하고, 해 질 녘 거의 땅에 도달해서 산란해. 저녁 하늘이 빨간색으로 물드는 이유는 이 때문이야.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이준익이 감독하고, 박정민과 김고은이 주연한 영화 <변산(2018)>에 나오는 말이야. 격포, 고사포, 채석강으로 이름난 변산의 노을을 이보다 어떻게 더 맛깔스레 표현할까. 이곳에 저녁이 내리면 한 폭의 수채화가 펼쳐지지.


변산의 석양


변산의 저녁 하늘이 왜 붉게 탈까? 그걸 알려면 태양의 고도와 빛의 거리를 알아야 해. 태양은 아침과 저녁에는 저 멀리 있다고, 한낮이면 머리 위에 자리하지. 한낮의 태양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기 때문에 태양과 우리의 거리가 짧아. 반면에 해 뜰 무렵과 해가 질 때면 태양과 우리의 거리가 멀어져. 태양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햇빛이 땅에 도달하는 거리도 길어져.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rawlife125/221385600651


해 질 녘 태양의 고도는 낮아지고 비스듬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어. 저녁의 햇빛은 한낮의 햇빛보다 먼 거리를 달려온 거야. 달려오는 동안 파장이 짧은 색깔의 빛들은 공중에서 흩어져. 해가 어스름할 때쯤이면 긴 여행을 마친 붉은색 계열의 빛만 지표면 가까이 도착하지. 저녁 하늘에는 긴 여행에서 살아남은 붉은색 빛이 마지막으로 산란해. 그들이 장렬하게 산화하면서 뿌리는 빛이 바로 붉은 노을이야.


빛은 1초에 약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약 1억 5천만 km의 거리를 달려왔어. 저녁노을은 빛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리는 장엄한 서사시야. 태양을 출발한 백색광은 마침내 붉은 노을이 되어 산허리에 고단한 몸을 누이지. 남도 삼백 리를 걸어가는 나그네도 술 익는 마을에 들러 하루의 여정을 마치겠지. 어쩌면 그의 얼굴도 붉게 타올랐을지도 모르겠어. 하늘에는 노을이 붉고, 나그네의 얼굴은 술이 붉을 거야.


인생도 그럴 거야.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무수히 부딪히고 깨지고 흩어지지. 견디지 못한 마음은 산란하고, 아픔으로 가슴이 파랗게 멍들 거야. 고통을 견디고 끝까지 견뎌야 해. 시련과 아픔을 딛고서 마지막 순간까지 열정을 태우지 않으면 안 돼. 그래야 훗날 삶의 여정을 마치는 순간, 우리도 저 대답 없는 노을처럼 붉게 타오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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