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여름을 밀어낸다고
세월이 청춘을 밀어낸다고
그들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원래 산다는 것이 그런걸
17층 아파트 우리 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창문을 열자마자
싸하고 밀려오는 소슬바람
그래, 바로 너였구나
올까 말까
뭉그적거리며 버티는 가을을
기어이 데려온 건 너였구나
갈까 말까
멈칫하며 버티는 여름을
기어이 떠나게 한 것도 너였구나
그예 밤바람은 차가워지고
귀뚜라미 소리 요란한 시간
8월의 뙤약볕을 견뎌낸
무르익은 과일과 곡식이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는 계절
계절은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지만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청춘이라 해도
아직 서러워해야 할 때가 아니다.
계절은
대나무 옹이 만들듯
내 마음에도 마디를 남겨
한 뼘 넘어 자라게 할 테니
가는 세월이 서러워도
아직은 남은 시간을 사랑할 때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프고 쓸쓸한 일
미움을 받는 것은 더 슬프고
그중에서도 제일 슬픈 건
사랑도 아닌
미움도 아닌
이미 잊힌 사람이 된 것
존재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을
미워할 일도 없고
멀리할 일도 없고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도
아는 채 않고 데면데면 지나칠 뿐
세월은
사람들을 점차 잊히게 만들고
한때 그렇게 들끓던 열정도 식고
기억 속의 사람들도 하나씩 지워지고
나 또한 그들의 잊힌 사람이 되겠지.
사는 게 원래 그런 걸
누가 누구를 원망할까
바람이 여름 흔적을 지우면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잊히듯
세월이 애틋한 기억을 지우면
우리도 잊힌 사람이 되는 걸
서러워할 일 뭐 있고
눈물 흘릴 일 뭐 있나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그러니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보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아니면 앞산 뒷산 올라
신의 붓질이 매끈한 총천연색
가을 파노라마를 보는 것도 좋은 일이고
바람이 여름을 밀어낸다고
세월이 청춘을 밀어낸다고
그들을 원망할 일은 아니다.
침묵하고
조용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일
새벽잠을 깨운 바람을 탓하며
애꿎은 세월을 원망해 보지만
원래 무심한 시간은
힐끔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제 갈 길만 뚜벅뚜벅 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