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빛을 나누는 달리기
2025년 10월 추석 연휴, 진짜 마지막 날
눈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다고 믿는 순간 이미 뇌가 그 장면을 ‘예상’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측 코딩(predictive coding)’ 이론에 따르면, 뇌는 끊임없이 세계를 추론하고 예상한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온 감각과의 차이, 즉 오차를 수정하며 세상을 업데이트한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방에서도 익숙한 물건을 알아볼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뇌가 그 물건의 형태와 색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단순히 ‘본다 → 인식한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뇌는 언제나 가정하고, 비교하고, 수정한다.
즉, 뇌는 단순한 수용기관이 아니라 세상을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장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맥락효과(contextual effect)이다.
예를 들어, 아래 (A) 체커 그림자 착시에서는 사각형 A와 B가 실제로 같은 밝기임에도, 원통의 그림자라는 맥락 때문에 B가 더 밝게 보인다.
또 (B)뮐러-라이어 착시에서는 두 선분의 길이가 같지만, 화살표의 방향 때문에 A-B 길이보다 B-C 길이가 훨씬 더 길어 보인다.
우리 뇌는 단순히 복사하지 않는다.
세상을, 맥락을,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왜 갑자기 시각 이야기냐고?
이유가 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 나는 처음으로 ‘빛나눔’ 모임에 나갔다.
'빛나눔'은 시각 장애인과 함께 달리는 가이드 러너를 뜻하며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회 가 공식 명칭이며 VMK(The Visually Impaired Marathoners in Korea)를 영문약어로 한다.
그날 나는 조금 늦게 도착해, 달리기를 시작한 지 1년 된 30대 이○○님과 남산 순환코스를 함께 돌았다.
가이드는 처음이라 긴장했지만, 그분은 놀랍게도 내 리듬에 잘 맞춰 주셨다.
남산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조화로운 코스로, 일반인도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호흡을 잃지 않았다.
역시 ‘남산은 마라톤의 성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나보다 연배이신 강○○ 부회장님이었다.
무려 남산 4회전.
한 바퀴가 약 7km이니, 하프 마라톤이 넘는 거리다.
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 정도 체력이라니, 진심으로 경이로웠다.
사람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통계에 따르면 가장 생산적인 시기는 60세에서 80세 사이다.
노벨상 수상자 평균 연령 62세,
세계 100대 기업 CEO 평균 63세,
미국 100대 교회 목사 평균 71세,
‘아버지’의 평균 연령은 76세라고 한다.
50세 이전은 아직 ‘예열 구간’일지도 모른다.
육체, 정신, 사회, 영적 건강이 조화로워야 가능한 일이다.
결국 체력이 그 바탕이다.
그래서일까, 강 부회장님은 올해 인천 대표로 패럴림픽 전국체전에 출전하신다.
가이드 러닝에서 중요한 건 가이드와 시각 장애인 주자간 합이다.
앞사람을 추월하다 강부회장님과 다리가 엉켰다.
강부회장님이 경험에서 우러나는 말을 하신다.
"가이드와 주자간 이인삼각하듯 보폭이 같으면 자연스럽게 팔치기가 일치되어 쉽게 뛸 수 있어요"
달리기는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료와의 호흡이 중요한 운동이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할때는 더더욱.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할 때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트럼프가 북미 관계 개선을 위해 Peace maker가 된다면, 나는 Pace maker가 되어 열심히 뛰어 주겠다."
시각장애인 페이스 메이커는 주자보다 앞서 나가면 사고가 나기 쉽다.
조금 뒤에서, 같은 속도로, 같은 리듬으로 달릴 때 비로소 둘의 합이 맞아 돌아가 사고의 위험도 줄어들고 호흡도 평화로워 진다.
그래야 Pace maker가 Peace maker가 되고 Peace maker가 되어야 Record maker가 될 수 있다.
10월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10월12일(일)
나는 시흥 마라톤 대회에 첫 가이드러너로 참가했다.
눈이 전혀 보이지 않는 60대 어르신과 함께 5km를 달렸다.
둘 다 초보였다.
추월하다 가로등에 부딪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분명 내 잘못이었는데, 어르신은 “괜찮아요” 하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그때 알았다.
남을 가이드한다는 건, 생각보다 무겁고도 섬세한 일이라는 걸.
특히 경험 없는 리더라면 더더욱.
우리는 43분 만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분은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마웠다”고 하셨다.
나는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
제대로 가이드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은 미소로 답했다.
그날 나는 눈보다 ‘마음의 시야’가 더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빛은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달릴 때, 그 안에서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