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달리기 후기 _ 첫 경험
누구나 첫 경험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하다.
나의 첫 공식 마라톤은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일대에서 열린 10km 대회였다.
1시간이 넘는 기록으로 겨우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그 순간의 숨결과 땀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나의 첫 풀코스 참가는 2008년도에 조선일보에서 개최한 춘마(춘천 마라톤)이었다.
몇 번의 10k 와 하프를 뛰고 나서 풀코스쯤은 이란 근자감(?)에 혼자 덜컥 참가신청을 하였다.
당연히 LSD 훈련도 없었고,
심지어 에너지 젤을 준비해야 된다는 기본 상식도 없이 출전하였다.
4시간 20분대로 거의 죽을힘을 다해 결승전을 통과한 기억이 선명하다.
완주 후 사우나를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 난간을 겨우 잡고 후들거리며 내려간 기억은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2018년 4월 21일
처음으로 런엑스런이 주최하고 동두천시가 후원하는 '코리아 50K' 트레일런 대회에 출전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 새로 뚫린 포천 고속도로를 달려 9시쯤 동두천 종합운동장에 도착했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우유로 간단히 식사하고,
선수 등록을 마친 뒤엔 처음으로 콜럼비아 부스에서 테이핑을 받아봤다.
11시에 오지개 고개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고,
정오 정각, 드디어 출발 신호가 울렸다.
다행히 미세먼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 산속의 청량한 공기가 아닌 미세먼지만 마시는 레이스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날씨가 예상외로 더워 꽤 힘이 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변엔 외국인 참가자들도 많았다. 국적도 미국, 대만, 일본 등등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 같았다.
국기가 그려진 배번표 덕분에 국적이 금세 눈에 띄었다.
트레일런의 전설, 심재덕 선수도 27k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실물로 뵙게 되었다.
자그마한 키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심재덕 선수를 보고 있으니 저절로 ‘고수’의 기운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심선수는 심지어 필수장비인 백팩도 없이 손에 생수 한 병을 들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시간 28분 30초로 우승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진짜 고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심재덕 선수의 개회사가 있고 드디어 12시 정각에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가파른 언덕길이 이어지고 내리막길, 다시 오르막길이 이어졌다.
산길, 숲길, 임도, 군부대, 계단길, 포장도로, 낙엽길, 진흙길...
뛰고, 걷고, 숨을 몰아쉬며, 물을 마시며,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오르막의 아득함,
내리막의 짜릿함,
숲 속 바람의 청량함,
CP에서 마신 차가운 생수 한 모금,
흩날리던 꽃비,
앞서가던 대만 여성 선수를 따라잡던 짜릿한 순간,
그리고 마지막 피니시 라인 앞에서 종을 울리며 응원해 주던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
모든 순간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웃으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기록은 4시간 6분 8초.
목표로 한 4시간 안에는 들지 못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충분히 승리였다.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장에서 땀을 씻어내고,
주최 측이 제공한 무제한 맥주와 안주로
몸과 마음을 천천히 식혔다.
첫 키스처럼 설레고,
첫 마라톤처럼 치열했던 그날.
내 인생의 첫 트레일런은
아직도 달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