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달리기 후기 _ 111
2018년 10월 20일~21일, 흐릿하고 스산한 구름이 낮게 드리웠던 날
一切皆苦(일체개고)
제주 트레일 런은 이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대회였다.
집과 회사에 눈치가 보여 가능한 짧은 시간 동안만 대회에 참가하려고 타이트하게 비행기표를 예약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일이 꼬였다.
대회 전날인 2018년 10월 19일 오후 6시에 제주대에서 오리엔테이션 있어 오후 4시에 출발하는 제주행 비행기를 예약하였다.
그런데 저가항공사라 그런지 출발시간이 30분 지연되어 5시 30분이 돼서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제주대로 향했지만 제주대 입구 버스정류장에 내린 시간이 6시 반에 훌쩍 넘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리엔테이션 장소인 제주대 운동장까지 가는 시간도 꽤 걸려 7시 반이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당연히 오리엔테이션은 끝나 있었고 서둘러 장비 검사와 선수 등록을 마쳤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지 못해 찜찜했지만 프린트해 온 코스도를 보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에 계신 작은 형님과 늦은 저녁을 먹고 형님댁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자기 전 배낭에 필수 장비를 넣으며 무사 완주를 기원하였다.
예상 완주시간을 20시간 전후로 계산하여 시간당 하나씩 먹을 요량으로 준비한 에너지 젤 20개, 헤드랜턴, 휴대폰, 호루라기, 서바이벌 블랭킷 등등..
저녁 겸 해서 먹은 반주 한잔, 늦은 시각까지 켜져 있는 거실 TV, 내일 대회의 설렘과 두려움 등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2~3시간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4시경 기상하여 출발지인 제주대 운동장에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벌써 세계 각국에서 온 달림이들이 머리에 핸드 랜턴을 켜고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시 정각 출발시각에 맞추어 어둠을 뚫고 111K의 대장정의 막이 올랐다.
CP1 관음사 코스까지 약 10K를 1시간 10분에 뛰었다.
이젠 한라산을 오를 차례다. 삼각봉 대피소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일본에서 온 참가자와 서로 가져온 캔디를 교환하고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삼각봉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컷 찍었다.
그 후 급경사의 길을 겨우 겨우 힘을 내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 도착하였다.
백록담 정상에서 본 운해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덮어버릴 만큼 장엄했다.
후다닥 백록담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고 하산을 시작했다.
CP2 성판악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0분. 누적거리 27K.
여기서 라면과 바나나 등으로 이른 점심을 해결했다.
힘든 산행 후 먹는 컵라면 국물은 그야말로 꿀맛.
CP3 한남리 머체왓 숲길까지 비교적 평탄한 숲길을 여유롭게 달린다.
누적 거리 42K, 오후 1시 반이 다 되어 머체왓 숲길에 도착.
메밀꽃이 눈부시다.
이를 배경으로 예비 신랑 신부가 사진을 찍으며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이를 배경으로 세계 각국의 달림이들이 저마다의 경주를 이어가며 고통을 자처한다.
귤과 음료, 과자를 허겁지겁 먹고 안 되는 영어로 외국 친구와 잠깐의 농담을 한 후 CP3를 출발한다.
CP4 수악교 도착 시간 오후 4시 16분, 누적거리 54K
점점 힘들다.
이젠 거의 뛰지 않고 걷는다.
오른쪽 발목이 뛸 때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른다.
CP5 돈내코 도착 시간 오후 5시 57분, 누적거리 61K
점점점 더더욱 힘들다.
이젠 계속 걷는다.
오른쪽 발목 통증뿐만 아니라 걸을 때마다 사타구니가 옷에 쓸려 따갑다.
풀코스를 뛸 때 한 번도 발생하지 않은 일이 50K를 넘어가면서부터 발생한다.
CP6로 가는 한라산 둘레길 산길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었다.
분명히 이정 표시를 보고 갔는데 갑자기 이정표가 사라졌다.
밤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되지 않는다.
갑자기 길을 찾지 못하고 이곳에 낙오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겨우 겨우 길을 잃은 지점으로 돌아왔지만 헤맨 시간과 정신적 데미지가 꽤 크다.
CP6 법정사 도착시간 저녁 9시 9분, 누적거리 74K
CP6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따뜻한 죽을 2그릇이나 먹었더니 그동안의 추위와 배고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세상 어떤 미슐랭보다 값졌다.
CP7 돌오름까지는 꽤 오르막이다.
한라산 밤공기는 차가웠고
내 다리는 점점 더 무거웠고
하늘의 별들은 무수히 반짝였다.
바위로 된 길을 가고 있는데 빛들이 움직인다.
처음엔 주최 측에서 표시해 놓은 이정표 등인 줄 알았는데 이내 빛의 정체를 알았다.
반딧불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날아오르는 반딧불이의 영롱한 불빛은 황홀경 자체다.
그 순간, 내가 왜 이 고통을 택했는지 알았다.
고통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일체개고.’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살아 있었다.
CP7 가는 길에 2번이나 길을 헤매었다.
그나마 한 번은 주위에 여러 사람이 있어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었다.
CP7 돌오름 도착시간은 하루가 지난 10월 21일 00시 17분, 누적거리 84K
CP8 가는 길은 지도상 내리막길이고 11K 정도지만 매우 힘들고 지겨웠다.
발목은 비명을 질렀고, 사타구니는 불타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만하자’는 속삭임이 들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중얼거렸다.
“ 별거 아냐”
“ x팔, 별거 아냐”
“ 나는 할 수 있어”
그 욕설 섞인 만트라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통을 견디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주문이었다.
어찌어찌 CP8까지 도착한 시간은 3시 13분, 누적거리 94K
이미 완주 예상시간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다.
이런 페이스대로 라면 아침 7시로 예약해 놓은 비행기도 놓칠 시간대다.
비행기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CP9 관음사까지 코스는 그나마 길이 괜찮았다.
밤공기를 마시며 천천히나마 뛰어본다.
오른쪽 다리 통증도 어느 정도 견딜만하다.
CP9 관음사 도착시간 4시 59분, 누적거리 103K
CP9에서 바나나로 허기를 채우고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거의 쉬지 않고 출발.
1시간 내로 제주대에 도착해야만 비행기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코스에서 길을 잃었다.
외국인 부부를 포함한 4~5명이 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사이 날이 밝아왔다.
시간은 어느덧 6시를 넘어가고 결국 비행기를 놓칠 시간대다.
휴대폰으로 예약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를 놓칠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일요일이라 비행기가 모두 만석이고 공항에 와서 대기자로 대기하여 비행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길을 잃어 본 코스보다 돌아 돌아서 결국 제주대 운동장 골인지점에 당도했다.
골인지점 도착시간 6시 52분, 누적거리 111K
꼬박 24시간을 잠도 자지 않고 달려 111K를 완주하였다.
완주의 기쁨을 누릴 여유도 없이 짐을 찾아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7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비행기는 떠나고 어쩔 수 없이 대기자로 등록하여 비행기표가 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내 앞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결국 오후 4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또한 달리는 시간만큼 힘들고 지겨운 시간이었다.
비행기 좌석에 몸을 기대며 다짐했다.
“ 다시는 이런 미친 짓 하지 말자 “
하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자, 도전의 동물이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고통이라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고통 속에만 진짜 생이 있다는 것을.
그날의 반딧불이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꿈꾼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250킬로미터를 달리는 나를.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