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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뛰퇴남의 달리기 인문학

12. 달리기 후기 _ 123

by wangane

2021년 4월 16일, 낮은 구름 드리워진 날


123

내가 오늘 올라야 할 롯데월드 타워 123층은 안개인지 구름인지에 가려 잘 보이질 않는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운(?) 좋게도 그 거대한 탑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터파기부터 골조, 콘크리트, 타워크레인까지.
매일 옥상에서 그 과정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떨어져 목숨을 잃던 날도 있었다.
마치 현장의 반장처럼, 한 층 한 층 탑이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완공된 타워를 바라보며 문득 ‘바벨탑’이 떠올랐다.

[ 피테르 브뢰헬(Pieter Bruegel le Vieux)의 ‘바벨탑’(Tower of Babel) ]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야에 정착해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땅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 좌절된 이야기.

그들의 교만과 욕망은 결국 서로의 언어를 잃게 만들었다.


참가 접수를 하려니 나이가 40이 넘는 사람은 건강체크를 해야 한단다.

혈압을 재니 130이 넘게 나와 왼팔로 다시 재서 겨우 통과.

옷을 갈아입고 주위를 둘러본다.

우리나라 유통회사 최강자인 롯데답게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무료 커피 한잔하고 운 좋게도 2UO라는 운동용품 브랜드에서 선물 득템도 했다.


나이순, 더 정확히는 배번호순으로 출발을 한다.

10시 40분경 내 배번호대에서 10초 간격으로 출발이다.

분명히 수직 마라톤이라 뛰어올라야 하는데 뛰기에는 너무 힘들다.

최대한 빨리 걸어 오른다.

계단식, 옆에 난간을 잡고

앞사람을 추월하기 위해서 바깥쪽으로 뛰어오른다.

체력소모가 심하다.

60층쯤 되자 땀이 흐르고, 안경에 떨어져 시야가 흐려진다.

안경을 벗고 땀을 닦으며 다시 오른다.

어느새 정상 123층 전망대.

잠실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석촌호수, 한강, 올림픽대교,

그리고 오픈OO 동호회가 훈련하던 잠실 보조경기장.

멀리 가락몰이, 그 너머 전세로 살고 있는 내 아파트가 흐릿하게 보인다.


수천 채의 아파트 중에 내 집은 없다.
그 사실이 갑자기 나를 움켜쥔다.
세상 사람들의 욕망,
남보다 높이, 남보다 빨리, 남보다 많이 가지려는 마음.
그 욕망이 이 도시의 탑들을 세웠다.
그리고 나도 그 안에서 살고 있었다.


오늘 나는 그 욕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123층을 올랐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
남보다 잘 살아야 한다는 교만,
그걸 내려놓기 위해.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 교만을 단 10%라도 흩어놓았는지 잘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는 단 3분 만에 나를 다시 지상으로 데려왔다.
유리 쇼윈도 속 명품들은 여전히 찬란했다.
나는 잠시 웃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욕망의 지상으로 내려왔다.”


123층을 오른 건 단지 체력의 시험이 아니라, 욕망의 내려놓음이었다.
탑은 결국, 세워진 높이보다 그 위에서 내가 내려놓은 것의 깊이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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