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달리기 후기 _롱기스트 런
2022년 10월 15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새벽에 일어나 몇 년 만에 마라톤 대회에 나섰다.
코로나로 멈췄던 대면 대회가 드디어 다시 열린 것이다.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롱기스트 런(Longest Run)’.
고맙게도 무료다.
여의도 공원에 도착하니 이미 출발 신호가 울렸다.
짐을 맡기고 몸 풀 새도 없이 바로 출발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날씨.
사람들과 함께 달리니 발걸음이 가볍다.
모처럼 온몸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박지성 선수가 나와 럭키드로우를 한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다.
박지성 선수를 실물로 보니 얼마 전 인터넷에서 떠돌던 박지성 선수의 발 사진이 떠 올랐다.
축구 선수라 발이 험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힘줄이 도드라진 거친 발 사진을 보니
그가 왜 대한민국 1호 프리미어리거가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박지성 선수의 발은 군대도 면제되는 평발이다.
놀랍게도 본인도 국가대표로 뽑히기 전인 2000년까지 이 사실을 몰랐다는데 이런 불리한 신체조건을 오직 피나는 훈련으로 극복한 것이다.
박지성 발 사진과 함께 '아름다운 발' 사진으로 화제가 되었던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은 더하다.
강수진의 발은 여기저기 물집이 잡힌 데다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변형되기까지 했다.
그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무대 뒤에 숨겨진 혹독한 연습의 흔적에 경의를 표한다.
내가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발은 살아있는 전설 울트라 트레일 러너 심재덕 선수의 발 사진이다.
그는 거제 대우조선해양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한 ‘철의 노동자’다.
한마디로 나와 같은 월급쟁이 직장인이다.
기관지 확장증 판정을 받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그는 “숨을 쉬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그는 서브3를 밥 먹듯이 해내며 국내를 평정했다.
그리고 세계 무대로 나아가, 울트라 러너로서 한계를 넘어섰다.
트레일러닝은 등산과 달리기를 합친 극한의 종목이라
발톱이 멍들고 빠지는 건 기본이다.
그의 발은 고통의 반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그는 달리고 있다.
여전히 현역으로, 여전히 한계를 넘고 있다.
마라톤 대회에는 언제나 다양한 이벤트들이 흥을 돋운다.
완주자들에게는 메달과 함께 초코파이 같은 간식을 주는데
예전에 막걸리에 파전을 주는 대회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오늘은 플랭크 1분 30초에 양말 득템,
룰렛 돌려 음료 1병,
현대차 시승 체험까지.
경기보다 이벤트 부스를 더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것도 또 하나의 ‘런’이었다.
여태 한 번도 헤드폰을 쓰고 대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헤드폰을 쓰고 뛰어봤다.
그런데 헤드폰을 쓰고 뛰어 보니 별로다.
역시 달릴 땐, 가벼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심지어 장비까지도.
기록은 40분대에 26초가 모자랐다.
조금만 더 빨랐다면 하는 아쉬움.
하지만 그 26초의 차이가,
다음 달리기의 이유가 된다.
1초의 소중함.
허투루 쓸 수 없는 그 시간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마라톤이 완성된다.
인생은 결승선이 있는 경기가 아니다.
그저 끝없이 달리는 마음의 여정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달린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오래.
Because life itself is the Longest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