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뛰퇴남의 달리기 인문학

13. 달리기 후기 _댕댕런

by wangane

2019년 8월 17일, 덥고 습한 여름의 한복판


경력에 비해 내 달리기 실력은 평범하다.
그래서인지 함께 달리는 사람들 속보다 혼자 뛰는 길이 더 편하다.

그런 나에게도 러닝메이트가 있다.


나의 러닝메이트를 소개한다.

- 이름: 짱아 (아들이 지어 준 이름)

- 나이: 만 9살 (2025년 기준)

- 성별: 남 (중성화 수술을 해서 남자 구실 못함)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

“아빠, 내가 똥도 치우고 다 할게!”

그 말에 넘어가 애견샵에서 작은 푸들을 분양받았다.


처음엔 아들이 짱아란 이름도 지어주고 잘 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은 금세 식었다.

(물론 약속했던 ‘똥 치우기’는 한 번도 안 했다.)


요즘은 내가 짱아를 제일 좋아한다.

가족 서열상 맨 마지막을 다투는 나와 짱아의 묘한 동료애라고나 할까 ^^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똥 치우고 배변판 갈아주고,

주말마다 산책과 목욕시켜주고,

주말마다 근처 공원이나 산을 찾아 달리기를 한다.

산에서는 짱아가 날아다닌다. 거의 심재덕 선수다.


2019년 여름휴가는 댕댕런 참가를 겸해서 강릉 바닷가로 떠났다.


8월 17일,

하조대 해수욕장에서 가족들과 신나게 물놀이를 한

오후엔 경포대 썸머댕댕런 대회에 참가했다.

사회는 ‘개통령’ 강형욱.

대형견, 중형견, 소형견들이

자신을 꼭 닮은 주인들과 함께 출발선에 섰다.

“땅!”

신호와 함께 개들이 폭주했다.
목줄을 잡은 주인들은 대부분 끌려가듯 달렸다.


그런데 짱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응가를 했다.

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한 손엔 똥 봉투, 한 손엔 목줄을 쥐고
텅 빈 출발선을 뒤늦게 뛰어나갔다.


산에서 날아다니던 짱아의 본능이 깨어났다.
통통한 시추를 추월하고,
뒤뚱대는 불독을 제치고,
다리 짧은 닥스훈트를 앞질렀다.

이제 선두권이 보인다!

하지만 짱아가 헉헉대며 멈췄다.
개는 땀샘이 없어 체온 조절이 어렵다.
길게 내민 혀를 보니 더는 뛸 수 없다는 신호였다.


결승선까지 2km.
포기할까 고민하다가, 잠시 그늘 아래서 쉬었다.
물 한 모금, 그리고 눈빛 한 번.

“괜찮지? 다시 가보자.”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짱아는 조용히 내 옆을 따라왔다.
다시 속도를 조금씩 올리자 짱아도 함께 뛰었다.
발소리와 숨소리가 맞아떨어졌다.

앞서가던 셰퍼드를 제치고
오솔길을 통과하는 순간—

드디어,
나의 러닝메이트 짱아와 함께
결승선을 넘었다.


7등.

내 마라톤 인생 첫 입상이었다.



무대 위에 올라 상장과 함께 푸짐한 선물을 받았다.

선물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짱아가 쓰고 있는 방석과 사료와 장난감으로 모두 반려견을 위한 것들이다.


짱아!

넌 나의 영원한 러닝메이트이자 '개(?)라토너'야.

함께 달리는 그 시간,

나는 언제나 행복하다.


keyword
이전 12화매뛰퇴남의 달리기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