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달리기 후기 _ 108배가 아닌 109K, 24H 아닌 25H
2023년 10월 21일 5시 ~ 22일 6시 맑고 밝은 새벽
108배는 좋은 운동이며 훌룡한 수행법이다.
108K에서 1K가 많은 109K를 달리는 SEOUL 100K도 삶을 수행하기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올해 초 KOREA 50K는 출발 전부터 망했다.
대회 전날, 아들 친구들이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한다며 밤새 떠들었다.
잠 한숨 못 자고 달린 그 레이스는 몸도, 마음도 엉망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목요일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다.
아들에게는 단호하게 말했다.
“금요일, 파자마 파티는 절대 금지야.”
입고 갈 복장부터 초반 레이스에 필요한 준비 물품, 50K지점에 놓아둘 드랍백에 들어갈 물품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혹시 몰라 준비물 목록을 공유한다. 노란색은 당일 아침 입고 가거나 휴대할 물품 목록들이다.
코스도 몇일 전부터 보고 또 봤다.
목표는 단 하나, 24시간 이내 완주.
새벽 5시에 출발이라 대회장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부터 고민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카카오 택시를 불러 시청역으로 향한다.
새벽 4시에 도착한 시청광장에는 이미 많은 달림이들이 모여 있었다.
서약서를 제출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 특유의 긴장감이 서서히 몸을 휘감는다.
출발선에서의 설렘, 두려움, 그리고 흥분 —
그건 언제나 달리기의 기본값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출발했다.
인왕산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까지 12.9K.
첫 번째 U1 정릉분소 주차장 도착.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깨달았다.
'아, 이거… 처음부터 빡세다.'
이제 본격적으로 북한산을 3개나 넘는 고행길이 시작이다.
보국문을 거쳐 동암문까지 600m 넘는 봉우리를 오르는 두번째 CP 는 11.6K의 장미공원까지다.
후두둑 비가 내린다.
점점 심해진다.
뒤로 쓴 모자를 앞으로 가져온다.
그래도 내리는 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아직 셀카를 찍을 여유는 있다. ㅎㅎ
8.4K를 걷다 뛰다하여 U3 북한산성분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좀 넘었다.
뜨끈한 국밥이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한 번도 하지 않은 장비 검사가 있었다.
비가 와서 안전차원에서란다.
긴팔, 긴바지가 있냐고 묻는다.
긴바지는 드락백에 넣어 두었다고 대충 애둘러 말하고 밥을 먹으며 한숨을 돌린다.
위문을 거쳐 북한산 백운대를 오른다.
예전에 많이 와 본 길인데 왜 이리 정상이 먼지 , 사람들도 왜 이리 많은지, 단풍은 왜 이리 고운지 모르겠다.
대서문 , 대동문을 지나 U4 우이동 만남의 광장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늦은 오후 2시 8분.
마지막 북한산을 넘으면 힘든 건 끝난다.
영봉을 지나 우이역을 거쳐 드랍백이 있는 U5 국립공원 산악박물관에 도착할때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U5에서 컵라면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옷을 갈아 입고 있는데 사람들이 호들갑이다.
멧돼지가 나타났다.
몇년 전 제주 트레일 100K에서는 한 밤중에 영롱하게 빛나는 반딧불이를 봤는데 서울 100K에서는 멧돼지를 보다니. ㅎㅎ.
멧돼지가 사라지고, 나도 다시 길을 나섰다.
이제 절반을 왔다.
아니, 절반이나 왔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헤드랜턴이 시원찮다. 머리에 쓴 헤드랜던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혹시 몰라 여분으로 가져 온 헤드랜턴도 빛이 너무 희미해서 손에 들고 발 밑을 비추어야 겨우 조명 구실을 할 수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가야지 뭐.
가끔 동행하는 선수들의 헤드랜턴 불빛이 고맙다.
가뜩이나 밤눈이 어두운데 헤드랜턴도 맛이 가서 점점 알바를 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1K이상 길을 잃은 것만 2번, 짧게 길을 잃어 되돌아 온 것까지 합치면 10번이 넘는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라는 말은 트레일러닝에서도 정확히 적용된다.
지리한 밤길을 걷다가 뛰다가 졸다가 조그만 언덕들을 오르 내리다가 보니 U6 불암약수터까지 어찌어찌 도착했다.
불빛이 환해 다행이다 싶어 오른 불암산도 산속부터는 깜깜한 돌길이다.
겨우 겨우 정상을 찍고 내려와 철길이 길게 늘어진 철도 공원을 지나 나들이 공원 U7에 도착한 시간은 요일이 바뀐 일요일 새벽 1시.
DNF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심지어 의자에 앉아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있고.
이제 마지막 CP인 아차산만 넘으면 된다.
그나마 자주 와 본 아차산은 조명이 어두워도 대충 갈만 하다.
U8 아차산 생태공원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 반.
뜨듯한 스프와 커피 한잔이 추위와 배고픔을 덜어준다.
이제 하프코스 길이의 로드만 뛰면 끝이다.
강변 고수부지를 새벽에 달리는 일은 예상과는 정반대로 전혀 상쾌하지 않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로드길.
청계천이 이렇게 길게 이어져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홀로 걷고 있는데 날은 이미 밝아온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 나를 누군가 앞질러 뛰어간다.
이미 목표한 시간보다 2시간 가까이 늦었다.
25시간 안에는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정신이 버쩍난다.
몸 안에 바람이 충전된다.
남은 골인지점까지 뛰자. 3k 도 안된다.
하나도 힘들지 않다.
몸에 바람이 인다.
결승선을 통과했다.
100K를 뛰고 나니 가뜩이나 많은 주름이 더 늘었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잠도 안자고 이런 힘든 일을 하냐고?
누구나 버킷리스트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나의 버킷리스트는 UTMB 참가다.
이런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UTMB대회 출전을 위한 포인트 획득 때문이다.
그럼 내면적 이유도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내면 정화, 또는 수행법 중 하나라고 말해도 말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