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달리기 후기 _완주했지만, DNF라니
2024년 10월 26일 ~27일, 빛나는 억새가 눈부신 날
UTNP80K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간월재, 천황산, 영축산, 신불재, 신불산 , 그리고 나 자신이었다.
첫째 산은 회사였다.
산더미 같은 일에 눈치 보며 겨우 금요일 하루 휴가를 냈다.
둘째 산은 집이었다.
금요일 밤 가족과의 싸움을 모른 체하며 겨우 숙소를 잡았다.
셋째 산은 뜻밖이었다.
목요일 저녁, 예약한 모텔이 취소됐다는 문자. 환불과 함께 5만 원 쿠폰이 날아왔다.
‘이건 가지 말란 신호인가’ 싶었지만, 사정 이야기를 해 겨우 숙소를 다시 잡았다.
그렇게 세 개의 산을 넘고서야 비로소 진짜 산으로 갈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 난생처음 울산역에 도착했다.
할 일이 없어 분위기 좀 볼 겸 선수 등록도 할 겸 대회 장소인 영남알프스 복합센터에 셔틀버스를 타고 가보았다.
셔틀버스는 20~30분마다 운행된다는 공지글과는 다르게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었다.
분위기 좋다.
대회장을 둘러보고 선수 등록을 하러 등록본부로 향했다.
이때까지 사전 선수 등록이 이번 대회 불행의 시작이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선수등록을 마치고 옆에서 바로 장비 검사를 했다.
숙소에 짐을 두고 왔다고 하니 안전 장비를 철저히 하니 사진을 찍어 가란다.
다 챙겨 온 것들이라 "대회 중이나 끝나고 나서도 장비 검사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짐을 싸고 12시 다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드디어 대망의 대회 당일.
휴레 동호회분들을 만나 단체 사진을 찍고 심재덕 선수의 환영사를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선에 섰다.
얼굴이 안 보이니 사진빨이 괜찮아 보인다. ㅎㅎ
올해 서울 100k 우승자 심재덕 선수가 대회 축사 후 출발 종을 울린다.
"자랑스러운 동갑내기, 심재덕 파이팅!”
그렇게 나는 울산의 산속으로 들어섰다.
배내봉까지는 무난히 도착했다. CP1 배내고개까지는 껌이다.
1시간 반정도 걸려 10시 30분 CP1에 도착했다.
문제는 CP2에서부터 발생했다. 초반 오버페이스를 해서 인지 갑자기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휘청거리며 너덜길을 오르내리며 오늘 완주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DNF란 말이 떠 올랐다.
그때 떠올랐다.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지.”
스스로 다독이며 천황산을 올랐다.
억새는 은빛으로 흔들리고,
내 입술엔 사탕가루가 하얗게 묻어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걷뛰를 하다 보니 주암계곡 CP2에 오후 1시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든 코스는 거의 다 지났다.
CP2 엔 스폰서인 코오롱 스포츠에서 준비한 스포츠젤이 한가득이다.
별도로 안 챙겨도 될 정도다. 야채 죽을 먹으니 속이 편해진다.
속이 편하니 완주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뿜뿜 댄다.
CP3 신불산 휴양림까지는 비교적 완만하다.
이런 길에서는 달려야 한다.
물결치는 억새와
화이팅을 외쳐주는 등산객들과
높고 외롭게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달리다 보니
어느덧 CP3. 시간은 오후 2시 26분.
예정보다 2~3시간 빠른 페이스다.
CP4 가는 길은 마을로 들어가는 숲 속 둘레길에 배내천을 옆에 끼고 달릴 수 있는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배내천 억새 너머 깨 터는 소리가 난다.
깻잎에 삼겹살 생각이 간절하다. 막걸리도.
에너지를 에너지 젤로만 얻는 줄 알았는데 숲 속 상쾌한 공기를 뱃속까지 마시니 저절로 완충되는 느낌이다.
자연은 에너지 덩어리다.
몸과 마음과 영혼의 에너지 저장고다.
이 모든 것이 공짜다. 자연을 보호해야 우리 인간이 산다.
트레일 러닝이 추구하는 이상도 그러하다.
그래서 일회용 컵과 용기는 사용 금물이다.
내가 트레일 러닝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드롭백이 있는 CP4까지는 힘들지만 그럭저럭 왔다.
시간은 오후 4시 24분.
소고기 죽을 한 그릇하고 이온 음료로 목을 축이니 전반부를 잘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양말을 갈아 신고 방풍재킷을 입고 헤드랜턴을 챙겼다. ~~ 고 생각했는데 하나만 챙긴 것이다.
안전을 위해 배낭엔 항상 헤드랜턴이 2개 있어야 하는데.
CP5 엄수산을 힘겹게 지나 도가지 고개에 들어서니 어둠이 내려앉는다.
헤드랜턴을 켜니 사위가 밝아진다.
무지(無知)에서 깨어난 느낌.
돈오돈수(頓悟頓修)다.
CP5 오룡길 도착시간 7시 27분.
마지막 CP6 영축산 임도 12K는 임도라 달리기 좋은 길이다.
하지만 달리기 싫다. 걷기도 힘들다.
그래도 걷뛰 하여 밤 10시 전에 CP6 영축산 임도에 도착했다.
이제 가장 큰 고비 영축산만 넘으면 완주다. 새벽 1시 전에 완주하는 걸 목표로 길을 나섰다.
역시 만만찮다.
나는 대회 때 한 번도 스틱을 쓴 적이 없다.
적당한 스틱도 없을뿐더러 왠지 걸리적거려 보였기 때문이다.
계륵(鷄肋)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번 대회처럼 스틱이 필요한 대회는 없어 보였다.
오를 때 힘들어 주변에 스틱 될 만한 나무를 찾아들고 겨우 겨우 발걸음을 옮긴다.
한밤 중에 산 정산 중간 지점에서 일어나 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지막 고비 영축산을 오르는 중에 핸드랜턴이 갑자기 꺼진 것이다.
보조배터리에 충전케이블을 연결하니 헤드랜턴 불이 들어온다.
안심이다.
한 손으로는 헤드랜턴과 보조배터리를 머리 위로 들고,
한 손으로는 주운 스틱 나무를 쥐고 정상을 향해 다시 출발이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다시 꺼진다.
큰일이다.
어쩔 수 없이 배낭에서 여분의 헤드랜턴을 꺼내야 한다.
여분의 헤드랜턴은 성능이 별론데.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여분의 헤드랜턴이 안 보인다.
미치겠다.
DNF를 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다.
그런데 헤드랜턴 없이 내려가는 것도 큰일이다.
천만다행으로 내 페이스와 거의 비슷한 휴레 동호인을 만나 헤드랜턴을 구했다.
생명의 은인이다.
빌린 헤드랜턴도 그렇게 밝지 않아 영축산 정상을 오른 후 하산길에 길을 잃었다.
충전 중인 헤드랜턴을 잠깐 켜서 길을 찾지 않았으면 절벽으로 떨어져 골로 갈 뻔.
왜 헤드랜턴을 2개 챙겨야 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영축산 정산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북두칠성은 선명했다.
영축산 정산에서 내려다본 울산 시내 도로 불빛은 영롱했다.
영축산 정산 곳곳에 설치된 텐트 불빛은 찬란했다.
그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고생이 감사로 변했다.
바람은 차지는 않지만 계속 불어대고 신불재를 지나 신불산 정산까지 가는 길은 어둠 속에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두워서 달릴 수는 없었지만.
신불산을 내려와 피니쉬까지는 거의 임도다.
길을 헤매던 나를 추월한 주자가 뛰기 시작한다.
나도 따라 뛰기 시작했다.
막판 앞 선 주자를 추월하고 피니쉬까지의 흙길에 몇몇을 더 추월했다.
드디어 피니쉬에 골인. 새벽 1시 53분.
피니쉬 후 바로 장비 검사를 했다.
헤드랜턴 미 소지로 실격이란다.
국제대회라 규정이 엄격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다.
다 내 잘못이니까.
완주했지만 기록은 DNF 다.
새벽 2시
잘 곳도 씻을 곳도 없고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는 새벽녘에
남들로부터 받든 나 스스로 하든 항상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나?”
대부분의 직장인은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회의 많다고 회의를 줄이기 위한 방안 마련 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마나한 실행 안을 억지로 발언하고,
임원은커녕 팀장도 아닌데 임원 발표를 위한 발표자료 만드는데 야근을 밥 먹듯 한다.
월급날만을 바라보며 점심시간만이 유일한 기쁨인 직장생활은 자유의지가 1도 없다.
그러나 트레일러닝은 오로지 내 의지에 의해 참가를 하고,
내 판단에 의해 코스 공략법을 계획해서,
내 현재 몸상태에 따라 달린다.
가다가 힘들면 그만두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결과에 책임진다.
완주 후 느끼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은 덤이다.
이것이 내가 트레일러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트레일러닝을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몸을 힘들게 하여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함이다.
나보다 멋지고 잘 뛰고 좋은 아이템으로 장착한 러너들이 넘쳐나는 SNS 세상에는 시기 비교 열등감은 현실이다.
AI가 내 비서에서 에이젠트가 되었다가 곧 내 직업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떠들어대는 인공지능 시대가 내 미래다.
생각이 많아지면 불안이 몰려온다.
남과 비교하게 되고 그러면 불안은 더욱 심해진다.
생각을 멈추려면 몸을 힘들게 하면 된다.
트레일러닝은 산을 뛰기 때문에 주위 집중을 더 해야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생각도 멈추고 불안도 소멸한다.
트레일러닝은 자연스럽게 자연에서 햇빛을 맞으며 달리기 때문에 불안과 우울증과 기안84가 앓았다는 공황장애에 특효약이다.
트레일러닝을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주위 도움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화이팅을 외쳐주는 등산객들과
밤새 자원봉사를 하는 분들의 응원을 받으면 하일없이 완주를 하게 된다.
코스를 짜고 마킹을 붙이고 CP음식을 준비하고 후원사를 섭외하는 주최 측의 노고가 있었기에 내가 달릴 수 있었다.
한밤중에 실격을 무릅쓰고 헤드랜턴을 빌려 준 동호회 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완주는커녕 DNF도 힘들었을 거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받기만 한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빛을 빌려줘야 할 차례다.
UTNP 80K —
나는 완주했지만, 기록은 DNF였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완주” 두 글자가 선명하다.
“빛나는 억새 아래서,
나는 나 자신을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