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달리기 후기 _이틀 연속 산속으로
2025년 9월 27일, 늦더위 햇살이 따가운 가을날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엘리시안 강촌에서 열리는 블랙야크 트레일런 대회에 참가했다.
넉넉히 2시간이면 갈 줄 알고 7시에 집에서 나왔더니 이른 아침인데도 차들이 많다.
아마 긴 추석 연휴를 앞두고 다들 벌초하러 가는 모양이다.
겨우 출발 시간 10분 전인 8시 50분에 강촌에 도착하였다.
작년처럼 대회장 근처는 이미 만차.
숙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대회장으로 뛰었다.
벌써 지친다.
선수 등록을 하고 짐을 맡기는 사이에 출발 총성이 울린다.
1000여 명의 달림이들이 모두 떠난 출발선을 서둘러 나선다.
작년에도 그랬지만 초반 코스는 스키장을 올라 검봉산 정상을 찍고 다시 스키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늦게 출발해서 길이 좁아지는 스키장 중턱부터 발 디딜 틈이 없다.
달림이들 맨 끝에 줄을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올라간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계속 밀린다.
CP1뿐 아니라 CP2까지도.
조금만 늦었어도 컷오프(cut-off)를 당할 뻔했다.
작년과 다른 코스인 CP2 굴봉산역에서 에너지젤과 우롱차를 먹고 힘을 낸다.
산을 넘는다.
다시 보급소로 돌아와 목을 축이고 10K 로드 길을 달린다.
작년에 이 길은 너무 덥고 지겨워서 중도에 걷다 뛰다 했었다.
이번에는 초반에 기다리느라 힘을 그리 많이 쓰지 않아 그런지 달릴 만했다.
걷고 있는 주자들을 한 명, 두 명 추월하며 반환점을 돌았다.
갈대숲을 지나 다시 오르막 도로를 뛰다 걷다 하다가
막판에 힘을 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기록은 작년보다 40분이나 늦은 4시간 22분.
이렇게 기록이 나쁜 것을 주최 측의 코스 설계 탓으로 돌렸으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대회 참가 신청을 했는지도 문자 메시지를 받은 후에나 알게 될 정도로 관심이 없었으니 별도로 달리기 연습도 안 했고, 작년과 거의 같은 코스라 안심하고 CP별 도착 예상 시간조차 예측하지 않았다.
작년보다 늦게 도착해서 출발이 늦어져 대기 시간이 많아진 것도 모두 다 내 잘못이었다.
남 탓을 하면 마음은 잠시 편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모든 이유는 내 안에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행운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우울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ㅎ
2025년 9월 28일, 추적추적 이슬비가 폭우로 쏟아지다가 개인 날
어제 26K 트레일런을 뛰고 오늘은 인제 30K 트레일런이다.
이틀 연속 강행군.
심지어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올 거라는 기상 예보에 갈까 말까 고민이 많았다.
일찍 출발하기는 하지만 버스로 인제까지 데려다준다길래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대충 닦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택시 기사님께 버스 타는 곳을 잠실역으로 잘 못 알려 줘 하마터면 잠실 종합 운동장역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놓칠 뻔했다. 차에서 자는 둥 마는 둥 2시간 가까이 달려 대회 장소인 고사리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예보대로 이슬비가 조금씩 내린다.
장비 검사를 하고, 화장실에서 큰일도 보고, 몸도 풀고, 혼자 셀카도 찍고.
무명 개그맨의 흥을 돋우는 입담 웃으며 출발을 기다렸다.
드디어 출발이다.
간간이 내리던 비가 점점 굵어진다.
안경에 맺힌 빗방울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렌즈를 낄걸...” 후회가 밀려온다.
비가 잦아드는 후반부
강변의 나무 데크길,
미끄러운 바위길을 지나
겨우 골인.
비가 와서 뛰기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코스도 괜찮고 대회 운영도 깔끔했다.
씻을 곳도 있고 밥도 주니 나름 혜자 대회인 듯하다.
"내년에도 다시 와야지."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건
숲 속 여기저기에 버려진 에너지젤 봉지들이었다.
트레일런의 기본 정신은 ‘자연과 함께 달리는 것’이다.
개인컵을 의무화할 정도로 ‘자연보호’를 강조하는데
그 기본을 지키지 않는 참가자들이 있다니,
조금 씁쓸했다.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처럼
'사람은 자연을 보호하고 자연은 사람을 보호한다.'
이틀 연속 두 날의 달리기는 내게 두 개의 거울이었다.
하나는 나의 게으름을,
하나는 나의 가능성을 비췄다.
달리기는 기록이 아니라 태도다.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나은 나로 달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