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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뛰퇴남의 달리기 인문학

10. 달리기 후기 _ Runner가 아닌 Walker라니..

by wangane

2018년 3월 18일, 조금 흐리고 약간 추운 날


나는 러너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간지 나는 말.
또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불러줬으면 하는,
내 안의 작은 바람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한때 이 말은, 지금은 절판된 한 마라톤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2018년 3월 18일 동마 아침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으나 흐렸다.

7시 좀 넘어 도착한 광화문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옷 갈아입고 짐 맡기고 화장실 다녀오니 벌써 출발시간.

죄송하게도 제OO님 등 동호회분들과 C그룹에서 345로 뛰기로 한 약속을 못 지키고 B그룹에 서둘러 자리를 잡았다.

345는 서브 4, 즉 풀코스 마라톤을 4시간 안에 완주한 러너가 3시간 45분 내 완주를 목표로 잡는 현실적 목표다.

앞쪽에 3:50 페메분들이 보여 이들을 따라가다 하프 지나 조금씩 속도를 내면 345를 달성할 것 같았다.

반대로 하프 지나 페이스가 떨어지면 최소 서브 4는 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광화문을 출발하여 덕수궁을 지나 청계천, 신설동까지 3:50 페메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그러다 30km 지점에서부터 다리가 무거워지며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져 3:50 페메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31km 지점부터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 경기에서 걷기 시작했다.

1km쯤 걷고 다시 뛰었지만 페이스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잠실대교에 들어설 무렵, 4:00 페메가 나를 앞질러 갔다.


39km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젠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앞질러 잠실운동장을 내달렸다.

차마 잠실운동장 트랙은 걸을 수 없어서 종합운동장 들어가기 바로 전부터 뛰어서 간신히 골인.

4:24:06

풀코스 마라톤 최악의 기록이다.


여태껏 마라톤 풀코스를 뛰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상쾌했는데 이번 동마는 몸은 편한데 마음은 우울한 대회였다.


왜 걸었을까?


첫째,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운빨이나 재수도 통하지 않는다.

자신이 땀을 흘린 만큼 기록이 나오는 순박하고, 단순하고, 정직한 경기이다.

춥다고, 바쁘다고 핑계 댄 나 자신을 반성한다.


둘째, 마라톤은 정신력의 운동이다.

345를 목표를 하였지만 4:00 페메도 놓치고 나서는 목표를 잃어서인지

몸이 힘들어서보다 그냥 뛰기가 싫어졌다.

몸보다 먼저 무너지는 건 마음이다.

35km 이후는 체력보다 믿음의 싸움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 나를 반성한다.


셋째, 마라톤은 걸으면 안 되는 운동이다.

처음 출발 시 들뜬 마음에 초반부터 오버 페이스를 했다.

그래서 진짜 마라톤이 시작된다는 30km 지점부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번 걷기 시작하면 ‘이제 그만하자’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린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됐잖아.”

그 속삭임을 이기지 못해 Runner가 아닌 Walker가 된 나를 반성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찌릿하게 울린다.

진짜 러너란 기록 좋은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걷지 않는 사람이다.


다음 마라톤에서는,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 걷지 않도록
다시, 뛰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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