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기가 흐르는 삶
2025년 10월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내가 3년 전 재취업에 성공한 회사는 공장이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중견 기업이다.
전문용어로는 팹리스(Fabless)회사 라고 한다.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엔비디아, 퀄컴, AMD 등이 있다.
입사 초기, 가장 낯설었던 건 회의 시작 전 모두가 “고객 감동!”을 외치는 문화였다.
아니 쌍팔년 제조업 공장에서나 있을법한 구호를 외치고 일을 시작하다니.
반도체라는 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회사 이미지와 전혀 맞지 않아 적응이 않됐다.
지금은 회의 마칠 때 "존중과 배려,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계속 외치다 보니 이런 상투적인 구호들이 점점 몸에 스며들었다.
고객이 원하는 성능을, 합리적인 가격에, 약속된 납기 안에 제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었고,
함께 협력하는 동료의 노력을 존중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아마 CEO는 이런 깊은 뜻이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러너가 서브 3을 달성하지 못하듯,
‘진정한 고객 감동’ 역시 쉬운 목표는 아니다.
반도체를 잘 만들기 위해서는 PPA를 고려해야 한다.
PPA는 Performance(성능), Power(전력), Area(면적)의 약자로 쉽게 말해서 성능은 좋아야 하고 전력은 적게 먹어야 하는데 사이즈는 작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게 말이 쉽지 이 세 요소 모두 트레이드오프 관계라 최적화하기가 쉽지 않다.
이 균형점을 찾는 것이 반도체 설계자의 숙명이다.
달리기에도 반도체의 PPA와 닮은 구조가 있다.
나는 이를 EEM이라 부른다 — Efficiency(효율), Endurance(지구력), Mind(정신력).
Efficiency(러닝효율)
좋은 러닝 폼은 에너지 낭비를 줄인다.
자동차로 치면 차체 정렬이 틀어지면 연비가 떨어지듯,
자세 불균형은 에너지 낭비를 만든다.
급가속·급감속이 연료를 낭비하듯,
케이던스(분당 발걸음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러닝 효율을 높인다.
Endurance(지구력)
지구력은 엔진의 배기량과 같다.
엔진이 클수록 오래,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다.
꾸준한 장거리 훈련과 인터벌 훈련이
체력이라는 ‘엔진’을 확장시킨다.
Mind(정신력)
아무리 좋은 엔진도 제어가 안 되면 금세 멈춘다.
러닝의 정신력은 ‘엔진 제어 소프트웨어’다.
루틴화된 호흡과 리듬으로 몰입(Flow)을 만들고,
포기하지 않는 집중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잘 달리기 위해서는
좋은 폼으로 러닝 효율을 높이고,
VO₂max(최대산소섭취량)를 높여 오래 달릴 수 있는 체력 키우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정신력으로 무장해야 한다.
나와 동갑내기 울트라 마라토너 심재덕 선수가 쓴 '나는 울트라 러너다.'에 높은 산을 잘 오르는 방법이 나온다. 처음부터 정상까지 단번에 공략하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장거리 달리기는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운동이라 마음이 선도해야 몸이 그 머나먼 거리의 장벽을 넘을 수 있다고.
그럼 이 장벽을 어떻게 해야 좀 더 쉽게 넘을 수 있을까?
목표를 쪼개면 된다.
예를 들어 1,000M 산을 오른다고 가정하면 정상까지 한 번에 가긴 힘드니 1차 목표를 200M로 정한다.
그러면 내 몸은 1,000M가 아니라 200M의 목표만 기억하고 그 구간을 쉽고 빠르게 달려갈 수 있다.
200M에 도착하면 다시 목표로 200M를 설정하고 거기까지 올라가고 그렇게 반복하면 어느덧 1,000M 산 정상에 도착해 있을 수 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개념인 WBS라는 것이 있다.
WBS(Work Breakdown Structure)는 프로젝트 관리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실무적인 도구로, 프로젝트를 작은 일 단위로 쪼개서 관리 가능한 구조로 만든 것이다.
반도체를 개발할 때도 A block은 언제까지, B block 은 언제까지 설계할지 설계 block을 쪼개 관리하면 더 효율적으로 개발이 가능하다.
러닝도 인생도 결국 이 원리와 같다.
작은 목표를 하나씩 달성하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반도체에서 전류가 흐르기 위해서는 Gate(문턱)를 넘어야 한다.
누구나 고난의 순간이 있다.
그 문턱을 넘은 자만이 불이 켜지고, 전율을 느낀다.
삶도 그렇다. 견디고, 버티고, 넘어야 전기가 흐른다.
집이 있고, 따뜻한 밥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휴대폰 있고, 인터넷 서핑 하고, 대학 졸업했다면,
당신은 이미 78억 인구 중 상위 7%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65세까지 사는 사람은 8%에 불과하다.
그 나이를 넘어섰다면, 더 이상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공기도
3분만 멈추면 생명이 꺼진다.
‘덕분에’ 숨 쉬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부처님은 밥은 얻어먹고,
옷은 시체를 감싸던 분소의를 입고,
잠은 벌레가 득실대는 숲 속에서 주무셨다.
그 사실을 안다면, 지금의 삶에 불만을 품기 어렵다.
PPA로 반도체를 최적화하듯,
EEM으로 러닝을 다듬고,
WBS로 목표를 쪼개며,
Gate를 넘어서는 순간 삶은 흐르기 시작한다.
결국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존중과 배려, 그리고 감사 —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삶을 구동시키는 진짜 전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