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답은 두 사람이 모든 옷을 벗고 본질에서 서로를 바라봄으로 가능하다 생각한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옷을 입는다. 가치관도 그 옷들 중 하나이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거기서 입게 되는 옷들이 있다.
프랑스는 왕조시대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대혁명이 필요했고, 시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하며 자유평등박애라는 국가 이념을 세웠고, 그 아래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사회 전반의 분위기로 자리 잡았다. 그런 사회적 영향력 아래 프랑스인들은 개인주의라는 가치관의 옷을 기본으로 입고 있다.
한국인의 정신과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인 유교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 및 인간관계, 도덕, 윤리, 교육의 기준이 되었고, 그 영향 아래 개인보다는 집단, 가족과 사회를 중시 여기는 집단주의적 가치관의 옷을 기본으로 입고 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우리가 자라 온 환경, 가정교육, 종교적 신념 등에 의한 여러 옷들을 입고 있다. 사회적 지위가 입혀준 옷들, 때론 부모나 친구들이 입혀준 옷들도 있다.
이런 여러 옷들은 환경과 시대 등의 주변의 영향력이 바뀌면 또 갈아입게 되고, 성장해 감에 따라 남들이 입혀준 이런저런 옷을 벗고 자신의 옷을 스스로 찾아 입기도 한다. 옷을 입고 벗는 과정은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변화의 과정이다.
문제는 ‘그 옷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본질과 본질의 만남, 내가 입은 옷이 아니라, 내 옷 속에 들어있는 나, 그 본질에서 만나 서로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의 ‘만남’을 경험한다. ‘자유’를 경험한다. 나의 참 자아는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참자 아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내가 수용되기를 갈망하며 사랑받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우리의 옷을 스스로 모두 벗고 우리 자신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를 나 자신이 수용하고 사랑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자아는 오랫동안 그것을 기다려 왔다. 그러고 나서 내가 입게 된 옷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이 옷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입혀졌던 옷이고, 이 옷은 부모님이, 이 옷은 나의 절친이, 이 옷은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이 옷은 직장에서, 생각해 보면 내가 입은 여러 옷들마다 나의 상황이 있었고, 나의 경험이 있었고 나의 아픔이 있었다. 그런 수많은 옷들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
내가 입게 된 옷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첫 번째 내게 입혀진 옷은 ‘착한 아이’ 옷이다.
부모를 기쁘게 하고, 선생님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끝없이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나’라는 가치관이 내게 입혀준 옷이다. 나의 욕구와 감정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를 채찍질한다.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죄책감이 들고 내가 쓸모없는 것 같다는 자기 비하를 한다. 갈등은 상대를 불편하게 할 수 있으므로 가능한 나의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 나의 권리가 침해돼도 상대가 권리를 갖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관계에서 수동적이고 순응적 태도를 갖는다.
완벽주의의 압박감과 책임감으로 나 스스로를 짓누른다. 나는 항상 착한 아이의 기준에 부족하다는 열등감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것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이다.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강압적 통제가 있을 때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한다.
또는 사회적 규범이나 문화적 압력, 집단주의 같은 문화에서 개인의 욕구보다는 집단의 조화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누르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아마 나와 비슷한 세대의 많은 한국인이 이 착한 아이 콤플렉스의 일부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성장하면서 착한 여자 콤플렉스로 또는 착한 남자 콤플렉스로 발전하여, 자신을 끊임없이 사회나 타인의 희생물로 내어주는 경향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제는 옷을 벗어야 할 때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를 대면한다. 나 스스로 모든 옷을 벗고 내가 나를 마주한다.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이제 더는 누가 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나에게 말해준다. 아무 옷을 입지 않아도 변함없이 너는 너라고.
그러고 보면 이 옷들 안에서 나는 보호를 받았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제야 어른이 되어 입혀준 옷을 벗고 스스로 옷을 입는다. 이번에는 이 옷들의 주인으로서, 누가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그 옷들을 입는 것이다. 이제는 나의 선택이다.
만약 나의 가치를 나의 소유나 성취, 성공, 타인의 인정 등에 둔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그 모든 것 아래 종속시키며 나의 가치를 그 아래에 두게 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의 가치는 그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나 자신의 고유한 독립적 존재가치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누구의 인정이나, 다른 누가 나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어떤 능력이나 지위, 소유의 어떠함이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아무 능력이 없어도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라는 존재 자체에 부여해 있는 한 인간의 가치, 그것이 나의 독립적 존재 가치이다. 또한 타인의 독립적 가치이다.
나에겐 항상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느꼈던 때가 많았다.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정립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도에 밀려 떠다니는 종이배처럼 나의 존재감은 주위 사람들의 나에 대한 반응이나 나의 성취 등 상황과 조건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이 숙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지나 다시는 흔들리지 않는 가장 깊은 곳에 흔들리지 않는 나의 존재 가치에 닻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진심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이유와 나아가 다른 사람을 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의 핵심 키는 모든 관계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되찾는 것이다. ‘나’의 바운더리를 복구하는 것이다. 나의 책임하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분과 반대로 내 책임 영역이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 책임 아래서 내 인생을 설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