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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 라 Aug 21. 2024

나와 너, 우리 사이와 경계에서

약속에 늦는 이유가 이기심때문이라 말한다면 당신은?

모든 관계에서 독립의 상태가 먼저 되어야, 나를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나’와 ‘너’의 구분이 먼저 이루어져야 ‘우리’라는 것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몽파르나스 광장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지금은 라데팡스의 퍼스트 타워가 더 높은 건물이 됐지만,  파리에서 가장 높은 마천루로 오랫동안 알려진 몽파르나스 타워를 오르려는 관광객들 때문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난 길 모퉁이마다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들과 식당들이 광장의 생기를 더해준다. 그중 한 구석의 작고 모던한 카페에서 친구 오드리와 약속이 있었다.


카페를 찾느라 시간도 걸렸지만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에  늦장을 부리느라 15분 늦게 도착했다. 오드리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어서 내게 일침을 가했다.


‘’ 네가 왜 15분이나 늦었는지 아니?’’

‘’무슨 말이야? ‘’

‘’ 너의 이기심 때문이야. 네가 늦은 것은 나의 시간을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야. 너 때문에 내가 15분을 아무것도 못하고 기다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고, 네가 그만큼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친구끼리 이런 걸 따지다니 야속했지만,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녀의 분석은 정확했다.


업무 관계에서 나는 약속에 늦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관계에선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


나의 이런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기적 일려고 그렇게 한 행동은 분명 아니지만 몸에 배어있듯 자연스러운 이 태도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나와 너, 우리의 바운더리


많은 생각 끝에 나는 ‘나’와 ‘너’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나의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친구는 내게 ‘우리’에 속한 사람이었고 우리 사이엔 뚜렷한 경계가 없기에 경계를 침범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에서의 삶은 나와 너의 경계선을 구분하고 그 경계선을 함부로 침범해서도, 상대가 내 경계선을 침범하도록 두어서도 안된다는 것을 배우는 시작이 되었다.


사실 관계 속에서 생기는 많은 고통들이 이러한 경계선의 모호함 때문에 일어난다. 특히 한국과 같은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너와 나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는 고통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젊은 세대들이 직장을 퇴사하고 싶어 하는 이유 중 ‘일에 대한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한국의 직장문화’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분명 6시 퇴근이라는 공적 약속이 있었음에도 6시 퇴근을 지키는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6시 이후에도 업무 관련 연락에 대기하는 것이 좋은 직장인의 태도로 평가받는다. 각자의 업무에 대한 계약이 있었음에도 상사라는 이유로 아래 직원에게 자신의 업무를 떠맡겨도 ‘좋은 직원’이 되기 위해 자신의 업무 외의 일까지도 힘써해야 하는, 그럼에도 보상은 기대할 수 없는 직장문화에 지친다. 차라리 답 없는 직장보다는 혼자 일하기를 택하고 싶다. 언제 이 직장을 떠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독립을 꿈꾼다. 좋은 직원을 얻기 위해선 이런 직장문화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경계가 없음으로 서로 고통스러워한다. 성인이 되어 충분히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엄마가 자신의 지저분한 방을 청소해 주길 기대하며 자신의 빨래를 맡기는 자녀, 정성껏 차려준 밥상도 모자라 자신이 먹은 그릇에 대한 설거지까지 요구하는 자녀. 엄마란 모든 사람이 넘나들어도 되는 경계 없는 공동지대에 있는 존재이다.


한국 엄마들의 놀라운 무제한의 사랑이다. 물론 사랑은 항상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끝없이 내어주길 요구당하며 자신의 행복을 꿈꿔보지도 못하는 인생이 엄마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자녀들은 부모의 이런 경계 없는 넘나듦에 고통스러워하며 독립을 간절히 꿈꾼다. 이런 불분명한 경계에서 부모는 자녀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자녀는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기를 강요당한다.


연인사이는 더더욱 경계가 모호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모든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나와 너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데이트 폭력도 이런 경계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시작되는 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의 60대 세대가 '주체적인 삶이 인생의 목표이자 이유'가 돼버린 까닭도, 경계가 모호했던 삶에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던, 그럼에도 그만한 보상을 느낄 수 없었던 삶에서 탈출하고픈 외침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독립'의 상태가 먼저 이루어져야, 나를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의 구분이 먼저 이루어져야 ‘우리’라는 것을 형성할 수 있다. 가족이 건전한 ‘우리’가 되기 위해선 ‘나’와 ‘너’의 경계가 먼저 분명해야 한다. 건전하고 균형 있는 모든 관계에서 기초되어야 할 주제이다.

 

나의 책임과 너의 책임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자신의 책임하에서 인생을 안전하게, 원망 없이 구축해 나간다.


자신의 책임을 구분지어야.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영역이 무엇인지도 구분이 되고, 도움을 준 이에게 정당한 감사를 돌려줄 수 있다. 자신의 지저분한 방을 엄마가 청소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도움을 준 엄마에게 감사한 일이다.


아버지들이 일터에 가서 때로는 자존심을 베어내면서까지 가정을 위해 열심히 돈을 버는 것도 당연한 일은 아니다. 고마운 일이다. 그 점에서 존경과 감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나와 너의 경계가 세워질 때, 사랑을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느끼며, 감사하게 된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 넘치는 사랑 속에서 불공정과 부당함, 학대, 착취가 일어나는 것은. 사랑의 가치에 비해 정의의 가치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랑에 있어서 ‘나’와 ‘너’의 구분과 존중은 정의의 기초가 된다. 정의가 기초되지 않은 사랑은 학대, 의존성, 불공정, 부당함, 편애, 착취, 무책임을 초래한다.


나는 정의와 사랑의 균형이 ‘독립’이라는 단어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인들 안에서 발견했던 ‘나’로 살아가는 ‘독립’된 삶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왔다. 모든 관계에서 어떻게 독립된 ‘나’로서 살아가는 지를 관찰하며, 잃어버린 나와 너의 균형을 되찾아가는 여정이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나만이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의 삶 속에서 보고 듣고 있기에, 함께 잃어버린 ‘나’와 ‘너’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항상 꿈틀거림을 느낀다.


진정한 독립은 ‘나’와 ‘너’를 동일한 저울 위에 올리고 나의 경계선을 존중하듯 상대의 경계선을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나의 경계선은 내가 발가벗고 자유로이 설 수 있는 곳, 상대의 경계선 상대가 발가벗고 설 수 있는 곳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단 우리 스스로 그곳을 열어 초대를 하기 전에는, 그곳을 열어 초대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서로 이해할 때, 그곳에서의 만남은 정의가 기초된 자유와 사랑의 교제가 넘나들수 있는 곳이 된다.


당신의 마음이 답답함을 느낄 때, 어쩌면 지금껏 당신이 감내해 온 이런 부당함과 불공정을 향해 외치지만 벽을 통과할 수 없음에 좌절한 마음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지 들여다볼 수 있길 바란다.


우리 마음의 외침을 들어주고 그 소원을 풀어줄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쩌면 이제 당신의 경계선을 구축할 때라고 마음에서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당신의 경계선이 구축될 때, 당신의 사랑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타인의 사랑을 사랑으로 누릴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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