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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 라 Sep 05. 2024

나와 너, 우리, 독립, 행복에 대해

내가 나를 받아들일 때 세상이 나를 받아들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타인도,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앗는 그대로의 타인을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게 한다. 새로운 차원의 사랑은 여기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서 보게 되는 고흐의 명작 중 하나이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 그의 불안, 희망, 고독을 하늘의 소용돌이치는 별들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그림이다. 고흐의 작품에서 특별히 우리가 느끼는 강렬함은, 어쩌면 자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깊은 갈등과 혼란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표현함으로, 그의 감정이 필터 없이 보는 이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35편이나 되는 자화상을 남겼다. 아마도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탐구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했으리라. 그에게 있어 예술은 곧 그의 자아였던 만큼.  


그중 유명한 ‘’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속의 반 고흐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강조함으로, 자신의 고통과 내면의 혼란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직접 자신의 귀를 잘랐으니 그 내면의 고통은 얼마나 컸으랴. 그런 자신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바로 ‘그’ 임을 인정하며 스스로의 붓으로 자신을 그려낸다.  

출처 https://namu.wiki/w/%EB%B3%84%EC%9D%B4%20%EB%B9%9B%EB%82%98%EB%8A%94%20%EB%B0%A4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 자아 탐구의 시작일 것이다. 나의 상처와 실패와 실수를 포함한 숨기고 싶은, 들키고 싶지 않은 모든 것까지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나를 사랑하는 용기이다. 나만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 제일 어려운 일이 자신을 아는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나를 가능한 지우고 '우리'에 집중하는 것이 미덕’인  배경에서 자라다 보니 ‘나’로 시작되는 질문 자체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기까지 하다.


나 역시 프랑스에 가서, ‘너’로 시작되는 수많은 질문을 받은 후에야, ‘나’라는 주어로 시작되는 다양한 질문을 하게 되고, '나'를 통해 보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이 열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사랑하기’ ‘나를 알기’ 행복 가꾸기’ 이제는 우리 사회에도 한층 가까이 다가온 주제들이다. 어쩌면 이 주제들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한국인들에게 가장 절실한 주제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주제를 굳이 분석함이 없었던 시절에도 특히 한국인으로서 누리는 행복과 자유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사회에 전반적으로 넘치는 사랑과 정에서 누리는 안정감과 보호감이다. ‘우리’라는 그룹에서 누리는 소속감, 어디를 가도 낯설지가 않다.


크게 보면 모두가 가족 같아 어디서든 편안함을 느끼며 활동한다 (프랑스에 비교하여, 예를 들어, 여성이 길에서 술에 취해 쓰러져있어도 크게 이상히 보지 않는 것, 프랑스에선 길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누리는 행복을 위해 개인의 행복을 제물로 내어 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무엇이 옳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옳고 틀림은 없다.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각기 다른 과정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각 과정마다 관점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관점이 다르면 시작단추가 다르다. 관점마다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단추 구멍에 관점이 다른 상대의 단추를 끼어 넣으려고 애쓰면 옷만 찢어질 뿐이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여러 혼란들은 어쩌면 서로 다른 단추인 것은 보지 못하고 상대의 단추를 나의 단추 구멍에 맞추려는 데서 오지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나’로서 살아가는 한국인들과, ‘나’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행복 가꾸기’, ‘나를 사랑하기’ ‘나를 알기’가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MZ 세대가 생각하는 ‘행복’과 568세대가 생각하는 ‘행복’이 같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이 필요하다. 나아가 같은 단어에 대한 같은 개념의 공유를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서로 ‘통’한다.


한국인들이 연인이나 파트너 구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조건 중 하나가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진정 ‘통’하는 대화를 못해 갈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독립과 행복의 관계


각 사람마다 행복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다르듯, 프랑스인들에게서 발견하는 행복에 대한 생각도 우리의 것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삶의 목표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부터 달랐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저마다 행복에 대한 정의와 행복한 삶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느끼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며, 상대는 어떻게, 어디서 행복을 발견하고 느끼는지에 대한 대화가 일상적이다. 프랑스인들과 사적인 대화를 나눌 때마다 한두 번씩은 꼭 듣게 되는 문장 ‘’.... 해서 네가 행복하다니 나도 좋아’’ ‘’ 나는.... 해서 행복해’’ ‘네가 와줘서, 또는 너를 보게 되어 행복해’’ ‘’. 너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해, 잘 결정해’’ 등과 같이 ‘행복’이란 단어가 무수히 언급된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써내며 졸업을 하는 프랑스인들이니, 행복에 대한 그들의 심오한 경지를 이해할만하다. 프랑스인에게 성인이 되는 출발점은 어쩌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설계와 책임이 시작되는 지점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나의 관점에서 볼 때 ‘’좀 이기적인 거 아닌가, 자기중심적이네’’라고 생각되면서도, 놀라운 자기 사랑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자신을 저렇게 사랑하고 잘 알고 있으며 잘 돌보는 거지? 친구들끼리 헤어질 때마다 하는 인사말도 주로 ‘’ 너 자신을 잘 돌보아 주렴!’’이다.


이렇게 그들의 행복은 무언가 한국인으로서 내가 느끼는 것과 다른 것이 프랑스인들에게서 발견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어떤 다른 것이 그들에게 있는 걸까? 그 호기심의 끝에서, 프랑스인들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아는 데에 집중된 교육과, 성장하면서 점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배우며 ‘'독립된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장려하는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에서부터 이를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가정의 저녁식사 시간은 아이의 하루 일상에서 무엇이 좋았고, 무엇이 싫었는지, 왜 그렇게 느꼈는지를 가족들에게 말하는 시간이다. 저녁 식사 외에도 부모는 아이와의 일상에서 아이가 느낀 생각을 표현하도록 도우면서, 부모도 자녀를 알아가고 아이도 스스로 자신을 알아가도록 돕는다. 아이가 겪는 모든 일은 성장하면서 겪는 과정이므로 아이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 판단을 내려버리면 아이는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아이들은 자기가 먹은 접시는 설거지 통에 갖다 놓는다. 다 같이 먹는 저녁식사에는 어린아이들도 해야 할 역할을 분배받는다. 그들의 역할은 주로 그릇을 식탁에 세팅하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곧 일어날 부모님의 커피를 내려놓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자기 침대 정리와 장난감을 놀고 난 후 정리해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동안 장난감을 가지고 못 노는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이렇게 작은 일상에서부터 배워나간다. 독립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가족과의 이런 대화는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좋은 방법이 된다. 자신에 대해 스스로 느끼기, 그것을 당당히 타인에게 알리기,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별하기, 그것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자신의 생각에 아닌 것에는 부모에게라도 ‘노우’라고 분명히 말하기. 이런 과정들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고 자신의 요구를 당당히 타인에게 드러내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아이만 자신의 감정이나 필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부모에게 아이가 존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이로서 가족에서의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분을 처음부터 분명히 가르쳐준다.


부모는 아이의 말을 판단하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표현 속에서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다. 먼저 수용됨을 충분히 느껴야 아이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도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원칙을 알려주되 아이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만이 줄 수 있는 교육일 것이다.


부모는 어린아이가 비록 자신의 보호와 지도 아래 있을지라도, 그가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70억의 인구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지문을 가지듯,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한 독립적 가치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가치가 보호되고 발견되도록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 중 하나이다.


아이는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부모의 보호와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자아를 발전시키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면 부모가 되기 위해 부모를 떠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된 존재'로 잘 성장시키는 것이다.


독립의 목표


독립의 목표는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도적인 삶을 살수록 아이는 책임감을 배우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신에게 집중한다. 반면,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아니라 남에게 끌려사는 인생은 항상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남에게 집중하며, 원망과 무기력과 무책임에 빠져들게 된다.


같은 인생을 하더라도 자신이 주도권을 갖고 사는 인생과 누군가에 의해 끌려서 사는 인생에는, 처음 출발선에선 같아 보일지라도, 그 길의 끝에서 나게 될 차이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크다.


내가 아는 한 한국인 여학생은 부모님의 권유로 클래식을 시작해서 어린 시절부터 많은 콩쿠르에 입상을 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녀가 성장할수록, 성공할수록 부모님의 기대는 커졌고, 요구 수준도 높아졌다. 그녀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기에, 또 음악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콩쿠르 입상이 마치 그녀 인생의 목표인 마냥 다그침 받으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느끼지도, 음악을 느끼지도 못했다.


결국 그녀는 15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5시간의 연습을 하며, 프랑스 음악학교에서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1등으로 졸업을 하였지만, 영원히 악기를 내려놓는 결정을 하고야 말았다. 안타깝지만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녀답게 살고 싶어 하는 선택과 용기에 나는 큰 박수를 보냈다.


프랑스는 그래서 음악 교육이나 예술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보다, 먼저 음악을 느끼고, 그 음악 안에서 자신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아이의 음악에 대한 흥미 유발을 교육 목표로 둔다.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학습을 위해서이다. 그래야 음악이 그 아이의 것이 되어 그 안에서 그만의 해석으로 새롭게 탄생된다. 그것이 예술의 본질 아니던가.


가정, 학교, 사회 모든 차원에서 이렇듯 한 인간이 ‘독립된 나’로 살아가도록 돕고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회 전반적 분위기가, 프랑스인들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하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라 본다.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가족 동반자살 사건들은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존재가 아닌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것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책임 때문이며 사랑이라 포장할 수 있는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부모 아래서, 자녀 역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유교적 가치관이 부여하는 부모의 막강한 권위와 지위 아래, 자녀들은 성장하면서 부모가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판단하고 스스로를 자제하도록 훈련받는다.


문제는 아이가 아이답게 실수가운데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 정상임에도, 그것을 거부당하고 어른아이가 되길 요구받으며 자신을 어른 아이 안에 가둬버리게 된다.


어른이 되어서 우리는 어릴 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갇힌 채, 성장하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버린 어린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그 어린 나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

이제라도 내 안에 있는 어른아이가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인생에 결코 늦음이란 없다. 우리가 깨달은 그 순간이 바로 우리에게 최상의 때이다.


정작 나의 아이들은 이런 독립적인 아이들로 성장하길 바라며 양육한 덕분일까 부족했지만, 독립적이고 주도적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가꾸어 나가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독립을 못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스스로를 주장함이 아직도 힘들다. 아이들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그런 것들을 말하기 전에 먼저 미안한 마음부터 갖는다. 이유 없는 미안함, 부모라면 항상 갖는 부족하다는 느낌일까?


자신이 자른 귀에 붕대를 감기고, 상처 난 자신의 자화상을 마주했던 반 고흐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나의 실수와 실패, 부족함들이 먼저 보이지만, 반면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인생에 기회가 되어왔는지도 보인다. 나의 실수와 부족함이 결코 나의 약점이 아니라 나를 나답게 만들어내었던 좋은 약재가 되었음을 발견하며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이제부터는 실패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그 모든 것 너머에 더 좋은 모습의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음도 본다.


나를 사랑함에 이르는 것의 목적은 나를 사랑함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결코 자신만을 사랑함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나를 사랑할 줄 알고 나아가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온전한 행복의 문을 열고 앞을 향해 겁 없이 인생의 여정을 즐기며 나아간다.


반 고흐는 자신을 바라보는데서 그치고, 자신에게 집중하므로 결국 자살이라는 안타까운 결말을 맺었다. 자신에게 집중하며, 자신 만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게 되면 결국 열등감과 비교의식이라는 나올 수 없는 구렁에 빠질 뿐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타인도,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앗는 그대로의 타인을 받아들이는 여유를 갖게 한다. 새로운 차원의 사랑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내가 완전한 엄마가 아니라는 자책 때문일 것이다. 완전한 부모도, 완전한 자녀도 없다. 우리의 부모님도 완전하지 못했음을, 그들이 한 실수, 그들이 채워주지 못했던 사랑과 부족들도 그들로서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세상 그 누구도 우리의 필요를 다 채워줄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완전한 것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것들에서 사랑은 피어나고 행복은 채워진다.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서 비로소 우리의 자아사랑은 완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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