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국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겼습니다. 저도 당신에게 오늘 저의 이 서비스를 사랑으로 제공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비용은 원래 70유로인데 무료로 처리하겠습니다.’’
코로나가 성행하던 시기, 프랑스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코로나 검사를 하러 검사실을 찾았던 적이 있다. 간호사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반가워하며, 언젠가 한국으로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한국에 대한 관심에,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불쑥 대화가운데 튀어나오게 되었다.
‘’ 당신이 한국에 오면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서가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당신은 어딜 가나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식당에 가서도 식당 주인은 당신이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반찬을 더 내다 줄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서비스는 사랑의 개념이기에 서비스에 돈을 매기고자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한국에서 많은 서비스를 무료로 받거들랑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한국인의 사랑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
(사실, 프랑스는 모든 서비스를 다 돈으로 환산하기에 조금이라도 서비스가 들어간 것에는 엄청난 값을 지불해야 한다. )
그녀는 나의 말에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순간 밝아지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꼭 한국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겼습니다. 저도 당신에게 오늘 저의 이 서비스를 사랑으로 제공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비용은 원래 70유로인데 무료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눈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을 느꼈다.
밖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보고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더 나아갈 수 없었지만 서로의 눈으로 감사를 확인하며 인사를 하고 나왔다.
프랑스인들이 느끼는 한국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랑스 사회와 문화적 정서에서 누릴 수 없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는 독특함으로 느껴지고, 이런 독특함이 한국의 매력이리라. 반대로 한국의 정서에서 느낄 수 없는 프랑스만의 정서가 우리에겐 매력으로, 독특함으로 다가온다.
너와 나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에서, 사랑이 사랑으로 존중되기보다 당연함이 되어 남용되는 아픔도 있지만, 그럼에도 한국인의 헌신적 사랑과 희생정신은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의 비밀이라 생각한다.
모든 가산을 빼앗겨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주권 없는 나라의 자녀들로 살지 않도록, 조국을 위해 헌신한 숭고한 희생들, 굶주린 배를 움켜쥐며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땀과 피를 흘린 많은 아버지, 어머니들의 희생들, 이 모든 사랑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가치들이다. 이 점에서 항상 윗세대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한국인의 놀라운 잠재력의 바탕에는 사회 전체에 흐르는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이 있다. 이상할 수 있지만, 실재 한국과 프랑스의 공기의 차이를 몸으로도 느낄 수 있다. 프랑스에서 마실 수 없었던, 한국만의 독특한 공기가 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느껴진다. 한국만의 분위기, 한국 하늘 아래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에너지가 있다.
어디서나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우리’라는 커넥션을 통해 엮여 있는 거대한 공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하며 앞을 향해 거침없이 굴러가는 듯한 힘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우리’ 속에 들어있는 안정감과 사랑. 사랑을 충분히 먹고 자란 사람들이 활기차게 앞을 향해 분주히,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어느덧 나도 이들 중의 하나가 되어 앞을 향해 나가는 힘을 얻는다.
‘우리’라는 공동체 아래 우리는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것에 익숙해 있다, 이러한 협력의 힘은 혼자 짐을 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율적이다. 각 처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도 그런 힘중에 하나이다. 가정에서는 특히 모든 가족의 공통분모가 되어 가족을 위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엄마가 있고, 식당, 미장원, 관공서, 학교, 이사, 퀵서비스, 청소 서비스 등 값을 치르고 제공받는 서비스라 하더라도 프랑스에서 같은 값을 주고는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서비스들을 한국에서는 어디에서나 쉽게, 그것도 최상의 품질로 받을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서비스들이 많은 업무를 대신해 주므로 더 중요한 업무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에서 하루에 10가지 일을 해결할 수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1~2가지 정도가 가능하다. 한국처럼 다양한 서비스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작은 서비스라도 받으려면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그렇다고 그 서비스를 필요한 시간에 받기도 어렵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특히 프랑스는 행정지옥이라 불릴 만큼 행정처리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일을 처리해 주는 직원의 역량과 자유의지에 따라 행정처리가 1달을 넘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개인주의 사회이다 보니 각 개인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만큼 개인 간 단절이 있다. 각 개인이 자신을 책임지고 ‘나’를 위해 살기에 ‘헌신’이란 개념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무리 속에서 커넥션을 느끼기가 어렵다.
프랑스 사회가 커플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커플은 ‘우리’라는 개념보다는 ‘나’와 ‘너’의 개념이다. ‘나’의 연장선이다. 프랑스는 남녀 커플이 아니어도 주로 파트너를 이루며 산다. 커플이 아니고는 철저히 혼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원에서도 아이들은 주로 파트너를 이루어 놀이를 한다. 그렇기에 파트너에 대한 존중과 예절을 어릴 때부터 교육받는다.
프랑스인들이 한국인에게 부러워하는 모습 중 하나도 친구들끼리 ‘무리 지어 노는 문화’이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 익숙해 있고 함께 노는 놀이의 종류도 다양하다.
프랑스는 놀이도 주로 커플, 즉 두 사람이 즐기는 놀이들이 대부분이다. 파티 문화는 우리가 친구들끼리 노는 문화와는 조금 다르다. 파티는 외로운 싱글들이 주로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파트너가 될 상대를 찾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모인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우리’라는 끈이 우리에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 부분들도 있다.
‘우리’에는 ‘같음’ 또는 ‘유사함’ 이란 의미가 내포한다. 우리’와 ‘다름’을 ‘우리’ 안에 허용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라는 프레임이 기준이 되어 ‘우리’ 밖에 있는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우리’ 안에 들지 못하면 패배자 취급을 받거나 차별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외국 가서 겪어야 할 차별보다 한국 사회 차별, 멸시가 더 무섭다’라는 이유로 해외이민을 생각한다고 한다. 한국인이 있는 곳에 뜨거운 ‘함께’와 차가운 ‘분열’이 있는 이유를 나름 여기서 이해해 본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 ‘우리’ 안에는 지배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수직적 구조안에서 복종을 하며, ‘우리’라는 구조속에서 얻는 안정감에 대한 값을 치른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는 헌신적 사랑을 가치 있게 여기는 세계관’으로 인해 스스로 누군가의, 무엇인가에 스스로 구속되는 것에 익숙해 있다.
자발적 매임이 본인의 ‘주도적 선택’ 일 경우, 그것은 숭고한 사랑이다. 자발적 매임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경우, 마치 스프링이 일정 시간 눌려있다가, 눌렸던 만큼 튕겨 나오듯 언젠가 반동의 힘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 50~60대의 ‘졸혼’ 현상이 그동안 누르고 눌렸던 힘에 대한 반동 작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분명 자발적 매임으로 시작했지만, 나와 너의 경계선이 없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많은 것들이 그저 당연한 것이 되고, 시간과 함께 굳어지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사랑은 남용되어,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요구하고, 주장하고 불만이 되고 끝내 관계에 금이 나기 시작한다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 인식된다면 우리는 매일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도 사랑받고 있고 지지를 받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일 더 많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엄마가 차려주는 맛있는 밥상, 그것을 차리기 위해 장을 보러 가고 부엌을 정리하고 요리를 하며 밥상을 차리기까지 모든 과정은 그 밥을 먹어줄 사람을 위한 사랑의 시간이다.
그 밥을 먹으면서 엄마의 깊은 사랑이 담겨있음을 본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을까?
밥상에 올라온 갖가지 야채들과 고기들, 생선들도 그저 우연히 내 밥상에 올라온 것이 아니다. 농부들의 땀과 어부들의 수고와 그것을 밥상에까지 오르게 하기 위해 유통과정에서 수고한 많은 손길들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모두 나의 밥상을 준비시켜 준 사람들이다. 내가 먹는 밥상 하나가 차려지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사랑의 수고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 밥상하나에도 내가 받은 엄청난 사랑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 일은 사랑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
모든 일은 사랑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먹고 살기만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가족을 사랑하고 나아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의 정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아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매 순간 감사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을 사랑으로 인정할 때 사랑은 더 큰 사랑을 불러오고 그 사랑은 행복을 만들어 낸다. 너와 나의 경계를 다시 세우데 사랑을 인식하고 인정하기 위한 경계로 세워나간다면 우리의 경계는 단절이 아닌 사랑이 사랑답기 위해 필요로 하는 정의에 기초된 사랑으로 발전해 나갈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