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세계에 나를 빠트릴 용기
가치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 모르는 세계에 자신을 빠트려라. 그것이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들어갈 때 자신을 보게 된다. 낯선 세계에 적응하며 자신의 가치관, 강점,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편견과 선입견 또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사람과의 결혼 역시,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세계에 빠지는 경험이다. 학교 생활 역시 아이에게는 익숙한 집을 떠나 낯선 세계에 빠지는 경험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이전에 몰랐던 나를 발견해 가며 우리는 성장을 경험한다.
낯선 프랑스에서의 나의 삶도 그랬다. 한국인인 나를 이해하고 한국인의 가치관과 강점, 약점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살아보면 한국이 어떤지도 새롭게 보인다. 다른 가치관이 갖는 기준과 관점에서 바라볼 때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발견은, 나에게는 ‘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 대신 ‘우리’가 있었다.
반면, 프랑스인에게는 ‘나’가 있고 ‘우리’ 대신에 ‘시민’이 있었다.
‘나의 ‘우리’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 네가 나고, 내가 너여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니까. ‘나’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 아닌 ‘우리’가 중요하고, 거기에 포함된 누군가가 중요하다. 누군가를 위해, 또는 ‘우리’가 추구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나’이다.
어릴 적에는 부모님, 결혼을 해서는 남편, 아이들이 태어나서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사는 존재, 그것이 ‘나’였다.
더 나아가 초등학교 때의 나의 일기장에는 ‘나라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치리라’’라는 다짐을 새기는 일기들로 가득했다. 매해 3월 1일이면 홀로 안방에 들어가 ‘유관순’ 영화를 보고,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나도 유관순 누나처럼 나라를 위해 살리라’는 결심과 다짐을 하며 한국인의 정체성을 마음에 새겼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내게 특별한 애국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586세대(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50대인 사람들)라면 이와 비슷한 다짐을 어릴 때 모두 했으리라 생각된다. 학교에서 아침마다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나라 사랑을 교육받고 다짐하며 자란 세대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였고, 그다음은 선생님, 부모님 순이었다. 유교적 가치가 부여하는 지배 질서에 따라, 가장 높은 권위에 있는 국가와, 교육을 베푸시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교육받았다.
애국, 근면, 성실이란 세 단어는 항상 교실 정 중앙 높은 데서 우리를 지켜보며 우리의 길을 지시하였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절대 권위를 가지고, 그에 비하면 어머니의 권위도 보잘것없었으니 자녀들의 권위야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정체성은 그 속에 존재함으로 부여받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프랑스에서 들은 낯선 질문, 반복적인 질문은 모두 ‘너’로 시작되는 문장들이었다.
‘’ 너는 뭘 좋아해?’’
‘’ 너는 뭘 원해?’’
‘’ 너는 어떻게 생각해?’’
‘’ 너의 행복은.. ’’
특별한 상황도 아닌 일상에서 어느 날 툭 하고 내게 던져진 이 질문들은 나의 인생을 조용히 흔들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고 생각해 봐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게 그 누구도 내 인생에서 뭘 좋아하냐고 물어온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장 큰 충격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가 내게 별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게 나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존재할 때 ‘나’라는 정체성을 부여받는 존재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공부 잘하는 아이, 결혼을 해서는 남편을 잘 보좌하고 사랑하고 필요를 채워주는 훌륭한 아내, 엄마가 되어서는 아이들의 행복과 교육과 정서적 사랑과 필요를 채워주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었고 내 삶의 목표였다.
행복은 이런 노력의 어느 끝자락에서 무수히 얻어지는 보상일 거라 생각했다. 아마 이건 나뿐 아니라 많은 한국 여성들에게 기본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가치관일 것이다.
이 가치관은 사실 유교사상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현모양처의 가치관이다. 유교사상에 깊은 뿌리를 가진 아버지의 교육과, 어린 시절 손자 손녀들의 교육을 담당하신 할아버지의 가치관이 내게 깊이 뿌리 내려져 있었던 것이다. 가정뿐 아니라 학창 시절 대부분의 선생님들들로부터 이와 같은 가치관을 교육받았다
가치관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나의 삶은 이런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나의 가치관이 무엇인지조차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나였지만, 사실 내 안에는 이런 가치관이 새겨져 있었고, 이것이 나의 세계관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이런 가치관에서 ‘사랑’의 개념은, 타인을 우선순위에 두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이런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끼리, 같은 사랑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하면서 서로의 필요가 채워진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균형이 있고, 사랑에 있어 같은 방향을 바라봄으로 서로의 사랑이 구축되어 간다.
그러나 서로 사랑의 개념이 달라, 예를 들어 한쪽은 상대를 우선순위로 두는 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나를 우선순위로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사랑해’라고 같은 단어를 말하지만 실재 내용은 다른 것이 된다. 한 사람이 바나나를 이야기할 때 상대는 오렌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희생을 사랑으로 두는 사람의 사랑이 남용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의 사랑은 균형이 잃어가며, 불공평함이 생기고 사랑은 시간과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의혹을 향해 가게 된다.
우리가 ‘배신’의 감정을 느낄 때가 어쩌면 실재로는 상대가 배신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과 개념을 가졌음을 알지 못해, 자신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상대의 행동이 배신으로 느끼는 것일 수가 있다.
이런 문제를 가장 흔히 겪게 되는 곳은, 서로 다른 두 가치관의 구체적 부딪힘이 이루어지는 결혼 생활이다. 사랑함으로 결혼했는데 왜 서로 사랑이 채워지지 않는 걸까? 사실 사랑의 문제라기보다, 가치관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나와 같은 586세대에선 애국심, 나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는 집단주의, 즉 ‘’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가 잘 되는 게 중요하고, 가정, 직장, 사회와 같이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적으로 공유되어 있었다.
이런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직장, 사회에서는 모두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도모하고, 공동체의 이익이 개인에게 분배됨으로 큰 불만도, 문제도 없었다.
만약 이런 가치관이 전반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공동체에, 개인의 이익을 우선순위로 추구하는 가치관을 둔 무리가 있게 되면,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순위로 둔 사람들과의 균형이 깨지고 불공평이 생겨날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이다.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의 기준을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한다.
부부사이에도 갈등과 문제가 있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서로의 가치관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 필요하다. 집단은 함께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소통과 공감이 있어야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조직에서의 갈등도, 앞으로 힘껏 나아갈 힘도 이런 가치관의 공유에서 출발된다.
지금 한국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태어난 세대에서부터, AI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선진국의 자녀로 태어난 세대까지, 세대별로 파노라마처럼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한 곳, 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한편, 세계가 하나가 되면서 한국 사회도 글로벌 세계가 되었다. 다양한 문화가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한다. 20여 년 전의 프랑스 사회와 또 지금의 프랑스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을 한국의 2030 세대에서 본다.
그러나 라이프 스타일은 프랑스인과 비슷하지만 568세대로부터 교육받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568세대는 자녀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이제야 자신의 인생 독립이라는 과제를 마주한다. 3040세대는 모든 세대의 스택트럼을 다 수용하고 있는 세대 같다.
‘우리’ 속에서 ‘나’가 없는 부모 세대를 보고 자란 MZ 세대는 ‘나’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개인주의적’ 가치관을 구축해 간다. 한편 부모 세대도 ‘나’가 없이 자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녀에게는 ‘나’를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
부모는 자녀들을 이해함이 필요하고 자녀들은 부모 세대를 이해함이 필요하며 같은 세 대 안에서도 서로를 이해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서로의 가치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서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