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받기
글 타이 마르크 르탄, 그림 벵자맹 쇼, 번역 이주희, 『알몸으로 학교 간날』(아름다운사람들, 2012)
‘알몸’으로 ‘학교’를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학교에는 규칙이 있고, 학생들은 그것을 지키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운다. 학교에는 정해진 답이 있다. 그래서 알몸으로 학교를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는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이 빗나갔다. 생각보다 복잡하고, 생각보다 심오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품어본다.
먼저, 아무리 늦었다고 해도 아이를 학교에 알몸으로 보내야 했을까?
늦잠을 잔 피에르는 옷은 입지 않고, 장화만 신고, 책가방만 메고 등교를 했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아찔하다. 피에르를 데려다주는 아빠와 피에르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장화와 책가방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찾게 된다. 아마도 장화와 책가방은 피에르가 자신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어 장치가 아닐까.
다음으로, 피에르가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이 알몸의 피에르를 배려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 같은데, ‘왜 피에르는 어색하게 보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피에르의 모습을 지적하거나 놀리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은 피에르에게 춥지는 않은지 물었다. 하지만 피에르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직 장화 속이 조금 갑갑하다는 생각만 했다. 따뜻하게 건네는 친구들의 말이 피에르에게는 진심으로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피에르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체육시간에 확인할 수 있었다. 신나게 깡충깡충 뛰어오르던 피에르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만히 서서 이상한 표정으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뛰는 것을 멈추었다. 피에르가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면서 즐거웠던 순간이었지만, 친구들은 그 모습이 불편했던 것 같다. 자신들과 다른 모습의 피에르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자신을 감추려고만 했던 피에르가 사람들 앞에 스스로 서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피에르는 마리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마리는 피에르처럼 알몸으로 학교에 온 옆 반 여자아이다. 그 아이도 장화를 신고 있었는데, 초록 장화였다. 피에르가 풀줄기를 찾다 들어간 풀밭에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풀줄기를 찾고 있는 마리를 만났다. 이들은 함께 풀줄기를 줍고 나뭇잎으로 신체의 중요한 부위를 가렸다.
자신과 같은 모습인 자체가 서로에게 반갑고 고마웠을 것 같다. 같은 모습에서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고마움과 위안이 피에르와 마리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알몸’이 신체에 아무것도 두르지 않은 상태의 몸이다. 자신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기도 하고,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꾸미지 않은 상태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에르가 들려주고 싶었던 ‘알몸’의 이야기는 솔직한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이 자신의 마음을 가볍게 하고,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옷과 장신구 등으로 자신을 치장하듯이 살아가면서 규칙, 제도, 예절 등으로 치장하는 것은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벗어던진 피에르 같은 사람을 보면, 괜찮은지를 묻게 되고, 그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부럽기보다는 불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주변을 떠나지 않고 날아다니는 새처럼 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자존감으로 무장되어야 당당하게 세상 앞에 표출되는 것 같다. 자존감 있는 사람은 자신 내면으로부터 책임감이 바탕이 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피에르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위안과 안정을 받아 자신감을 키웠고, 진정한 배려를 배웠고, 자립적 인간으로 자신이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 시간이 바로 피에르에게 ‘자유’와 ‘자존감’을 찾아가도록 한 것 같다. 그것이 피에르가 성장하는 시작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