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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화산이 끓어오르는 섬을 향하여

여행의 첫인상은 때때로 여정의 향방을 암시한다

나뭇가지 속에 숨어 있던 토템 인물상,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여행은 그 초입에서 여정의 향방을 암시해 주기도 한다

 


집을 나서는 느낌이 여느 여행과 달랐다. 이례적으로 이른 비행 스케줄이 그러한 느낌을 불러일으켰을까? 출국 비행기를 타겠다고 새벽 5시에 집을 나선 적은 처음이었다. 낯선 새벽 공기가 생소한 기분을 불러일으켰겠지 생각하며 공항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여행의 첫날에는 하루를 대표하는 장면이 있게 마련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내식을 받아 들던 순간이나 목적지에 도착한 직후의 비현실적인 현지 풍경, 혹은 숙소에 도착해 첫 샤워를 하고 난 후의 산뜻한 기분 등으로 그날의 인상을 기억하게 된다. 감정을 깊이 건드린 사건이나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현지 풍물의 일부가 기억을 압도하기도 한다. 반복되는 장면이나 현상이 첫날의 인상을 지배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여행의 첫날에는 사람이, 그 중에서도 현지인들의 모습이 유난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 첫 번째 인물은 발리행 항공기의 사무장이었다. 인자하지만 단호한 표정이 시야를 사로잡았다. 특히 그 깊고 새까만 눈동자가 블랙홀처럼 나를 통째로 잡아당겼다. 힌두교의 종교화에나 등장할 법한 신비로운 기운이 동공 안에서 풍겨져 나왔다. 이제껏 만난 동남아인들 중 가장 오묘한 눈빛을 지닌 이. 여행의 흥분은 인식을 자주 왜곡하는 법이어서 별것도 아닌 일을 너무 감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얻었다. 여행 수첩에 기록해 둔 당시의 내 상태 역시 꽤 차분하고 안정적이었다. 


‘여행을 나서면서도 특별한 감흥이 없다. 설렘으로 들썩였던 과거 출국 비행기들에서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르다. 안정적이고 편안한 상태다. 이제 한 시간 가량 더 날아가면 덴파사르에 도착한다. 졸린다. 어서 도착했으면 좋겠다.’ 


태평양 상공을 무심히 나아간 여객기가 발리를 향해서 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로비로 나서자 내 이름을 적은 종이가 저 앞에서 펄럭였다. 픽업을 예약해 둔 택시 운전사이자 내 기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될 두 번째 인물이었다.  


디디의 첫인상은 아주 인자했다. 내가 사는 서울에서는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다정하고 온화한 미소가 보살상을 떠올리게 했다. 목적지인 우붓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디디는 시종일관 솔직하고 겸손했다. 숨기는 말이 없었는데 그 목소리마저 아주 소탈하고 담백했다. 약간의 정적이라도 흐를라치면 따뜻한 음성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건네 대화에 온기를 채워 넣는 그 모습이 차량 안에서 잔잔한 파문을 만들어 냈다. 이따금 현지 생활을 솔직하게 대답하는 그 표정에도 매양 공손함이 배어있었다. 디디의 맑고 건강한 기운이 도시 생활로 찌든 나를 소리 없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35세의 유부남인 디디는 슬하에 세 자녀를 뒀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동창과 결혼해 곧바로 아들(15세)을 낳았고, 2년 후 딸(13세)을 낳았다. 최근 태어난 막내아들(2세)에게는 보너스 트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 말투가 꽤 따뜻하고 유쾌했다. 서 자바의 반둥에서 4년 전까지 오토바이 수리점을 운영했다는 그는 지역 경기가 어려워져 발리행을 택했다. 덴파사르에서 월세로 100달러(우리 돈으로 11만 원정도)를 내는 원룸 아파트에 온 가족이 거주한다는 설명. 세 자녀를 키워야 하는 디디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전을 했다. 애주가임에도 요즘에는 술을 자제한다는데 아내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한 시간쯤을 달렸을까? 디디가 목적지 부근이라며 차를 세웠다. 곧바로 차를 돌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디디는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내 뒤를 따라 숙소 안내데스크까지 올라왔다.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나서서 해결해 주려는 것 같았다. 내가 무사히 체크인을 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디디의 뒷모습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좀 더 잘사는 나라에서 왔고,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디디는 나를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사는 사람으로 치켜세웠지만 오히려 내 눈에는 마음 건강한 그가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듯 보였다. 인자하게 웃는 디디를 바라볼 때마다 부처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받은 만큼의 예우는 갖춰야겠다 싶어 차량으로 복귀하는 디디를 따라나섰다. 그럴 필요 없다는 그의 만류가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서기도 멋쩍은 일. 차량 앞까지 함께 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디디 덕분인지 발리의 첫인상이 꽤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장시간 이어진 그 보살 같은 웃음과 다정한 태도가 내 마음을 빠르게 녹인 듯했다.  


그다음으로 내 앞에 등장한 세 번째 현지인은 게스트하우스의 관리 스탭인 로빈. 커다란 눈망울에 동그란 콧방울을 가진 그는 아주 성실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체구는 작았고, 영어 솜씨는 근근했으며, 셈은 어눌했지만 투숙객에게 최선의 친절을 베풀려는 인상이 역력했다. 느긋하고 건들건들한 듯 보여도 그 바탕에는 언제나 공손함이 깔려 있었다. 별 것 아닌 농담에도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기 일쑤여서 마음이 더불어 여유로워졌다. 투숙객을 대하는 태도가 어찌나 극진하던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돈 몇 푼으로 과한 대접을 받는 상황이 불편해 격을 없애려고 시도했으나 나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은 한결같았다.  


로빈의 나이는 27세. 사춘기의 시작과 함께 사랑에 눈을 떴는지 슬하에 13세, 3세, 2세 세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내가 임신 7개월 차에 접어들면서 넷째를 맞이할 준비에 분주했다. 없는 살림에 다자녀를 건사하다 보니 로빈은 온몸을 던져 삶을 꾸렸다. 게스트하우스 관리에 온종일을 투신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피 터지는 일상일 텐데도 로빈의 모습은 늘 인자하고 온화했다. 평온함이 깃든 로빈의 얼굴에서 신의 표정도 이따금 튀어나왔다.  


그런데 왜 나는 여행 첫날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세 명의 현지인을 각인하게 되었을까? 왜 나는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발리를 첫 목적지로 선택했을까?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발리는 안중에도 없는 곳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세계의 문을 열고 입장하는 중이었다. 향후 나에게 불어올 변화의 바람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였다. 이 여행이 어떤 의미를 지녔고, 어떻게 흘러갈지도 당연히 눈치채지 못한 상태.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여행이 시작되었음에도 이전의 방식으로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중이었다. 


발리에서는 아궁 화산이 끓고 있었다. 대규모 분화가 예상돼 인근 주민 수만 명이 대피한 상황. 인터넷 역시 항공권과 숙박을 취소하려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아궁 화산의 분화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화산이 더 끓어오르더라도 여행을 주저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출국 비행기를 예약했다. 경우의 수를 헤아린 결과, 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 최고의 악재는 발리를 빠져나올 때쯤 아궁 화산이 분화해 공항이 일시적으로 폐쇄되는 것. 며칠간 항공 운항이 재개되길 기다렸다가 적당한 항공편을 타고 빠져나오자고 생각하며 발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고서 여행의 초입에서 묘한 느낌을 전하는 세 명의 현지인을 만났다. 


일련의 과정이 지나간 후에 깨달은 바, 세 사람은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암시해 주고 있었다. 굶주린 이가 전에 없던 후각으로 음식 냄새를 감지해내듯, 삶이 여전히 불균형한 내가 건강한 영혼들을 서둘러 포착해 내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런 줄 몰랐다. 생의 원리를 여전히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첩첩산중이 계속되던 시점이었다. 길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도 모른 채 자기다움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기 직전. 그 첫걸음을 내딛기 위해 화산이 뜨겁게 끓어오르는 적도의 섬을 향해 날아왔다. 




# 사건 혹은 장면에 담긴 상징의 해석

여행의 첫인상은 때때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암시한다. 내 경우에는 고대의 지혜가 깃든 외양의 소유자, 다시 말해 영성 충만한 인격의 이미지가 유난스럽게 시야에 들어왔다. 화산의 분화라는 원형적 상징과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발리의 신성한 분위기도 내적 상승의 욕망을 자극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수많은 여행지 중 발리를 선택한 이유도 그러한 상징들이 내면을 건드려 왔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나를 발리로 이끌고, 여정의 향방을 여행의 첫인상을 통해 제시한 셈이다. 암시된 바를 감식하고 그 내용을 독해하려면 인식과 감각을 어느 정도 단련해 두어야 한다. 내 경우, 심리의 세계를 탐구해 온 지 10년쯤 되었는데 아직도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심리학을 꾸준히 학습해 두면 좋겠다. 특별한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로 그림이 되겠다 싶은 장면을 골라 작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당면한 상황이나 장면들에서 내 심리와 감정이 무엇을 감각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차분히 살피다 보면 좀 더 선명한 각성에 이를 것이다. 굳이 감지되는 게 없다면 그냥 넘어가는 게 좋다. 뒤늦게라도 깨달음이 찾아오면 그때 상황을 되짚어 봐도 된다.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화산이 분화되고 있던 발리에 발길이 닿았다지만 괜한 모험심으로 위험한 상황에 성급히 뛰어드는 일은 가급적 피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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