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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영진 Nov 17. 2019

생활환경은 일상의 향방을 가른다

환경이 내면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붓, 발리, 인도네시아




생활환경은 내면의 상태와 긴밀히 연동된다



사진 작업을 위해 이번 여행을 감행했다. 그동안 찍은 여행 사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둘 필요를 느끼던 시점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필요한 사진을 꺼내 쓰는 데 큰 불편을 못 느꼈는데 이후 장기 여행을 몇 차례 더 다녀오면서 사진의 관리 상태가 어수선해졌다. 여행 원고를 청탁받을 때는 물론 개인적으로 필요한 일이 있을 때도 적합한 사진을 찾아내고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사진을 정리할 필요가 커졌다.


그동안 찍은 여행 사진의 수는 최소 수십만 컷. 한 컷 한 컷 확인하면서 추려내려면 족히 반년은 걸릴 듯했다. 국내에 있든 해외에 있든 어딘가에 틀어 박혀 사진과 씨름해야 하는 상황. 기왕이면 새로운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는 해외가 좋겠다 싶어 여행을 계획했다. 겨울도 멀지 않은 터라 몸과 마음이 움츠러드는 국내보다는 일조량도 풍부하고 날씨도 따뜻한 곳이 작업 장소로 나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 무렵, ‘디지털 노마드’라는 낱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디지털 노마드’는 급속히 발전하는 IT 환경을 이용해 장소에 예속되지 않고 원격으로 일하는 직업군을 칭하는 용어. 관련 정보를 검색해 보니 서양은 확산 속도가 빠른 반면 우리나라는 활성화 상태가 초보 단계였다. 직종이 꽤 다양했고, 근로 형태도 여러 가지였는데 그중 해외를 여행하면서 일을 하는 방식이 눈에 들어왔다.


스케줄이 유연하고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 프리랜서로 10년 이상을 지냈으니 이동 반경이 넓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딱히 새로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신 경향이라고 하니 마침 장기간을 요하는 작업 거리도 생긴 김에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구체적인 양상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어쩌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특정 지역 몇 곳이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거점 도시로 손꼽혔다. 서양의 경우 베를린, 바르셀로나, 부다페스트 등이 입에 자주 오르내렸고, 아시아권에서는 발리, 방콕, 치앙마이 등이 선도적 도시로 거론되고 있었다. 아시아권의 세 도시는 대륙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거리도 비교적 가까우면서 날씨도 따뜻하고 물가도 저렴하니 잘 됐다 싶었다. 


여러 가지 조건을 살핀 끝에 아시아권 도시 중 첫 체류지로 발리를 낙점했다. 가장 최전방에서 디지털 노마드 문화를 끌고 가는 곳 중 하나라기에 현지에서 작업을 해 나가면서 문화의 면면도 틈틈이 탐색해 보기로 했다. 이후에는 발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에게 어울리는 원격 업무 방식과 체류 지역을 선별해 그에 맞춰 움직이기로 했다. 방콕이나 치앙마이 중 한 곳, 혹은 두 곳 모두로 순차적 이동을 할 가능성이 컸지만 아직은 알 수 없는 일. 발리에서 생활하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발리에서의 체류 일정은 두 달로 정했다.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움직임이 가장 활발하다는 두 지역에서 각각 한 달씩 체류하는 시나리오. 창조적 에너지가 풍부해 보이는 예술 마을 우붓(Ubud)과 서핑의 핫스팟으로 부상한 짱구(Canggu)가 그곳들이었다. 어느 곳으로 먼저 들어갈까 저울질을 한 끝에 첫 방문지는 우붓을 선택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창작의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작용하는 풍요로운 자연환경과 발리 최고의 예술 인프라가 결정을 도왔다.


우붓에 도착한 직후, 동네부터 먼저 산책했다.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신속한 적응을 위해 지역 분위기와 지형을 파악할 필요도 있었다. 행인들이 빠져나간 늦은 시각의 밤거리는 적잖이 한산했다. 듣자 하니 우붓에도 관광객이 적지 않다는데 마주치는 사람이라고는 길모퉁이에 모여 시간을 죽이는 지역 청년들이 다였다. 저 발치로 몇몇 술집들이 영업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술집치고는 다소 차분한 분위기. 산책 도중 마주친 24시간 편의점과 뜻 밖으로 세련된 몇몇 간판들이 묘한 느낌을 자아냈을 뿐이다.


아침이 밝으면서 깊은 잠 속에 가라앉아 있던 읍내가 고개를 쳐들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동네 사람들의 기지개와 함께 우붓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숙소 라운지로 흘러드는 햇살은 더없이 화사했다. 찬란한 기운이 의욕을 북돋웠다. 상쾌한 기분으로 생활환경의 조성을 시작했다. 


유심카드를 구입하면서 전화를 개통했고, 한 달간 몰고 다닐 스쿠터도 무난한 가격에 렌탈했다. 현지 식당이 밀집한 골목과 대형 슈퍼마켓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생필품도 이것저것 구입했다. 치약, 샤워젤 등은 과거의 여행들에서도 중간중간 구입해 온 물품들이었는데 한 곳에서 장기 체류하게 된 때문인지 같은 물품을 두고도 구입 제품의 용량이 달랐다. 구입 물품의 종류와 제품의 크기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시켰다. 


하루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낼 협업 공간의 멤버십 등록도 마쳤다. 협업 공간은 디지털 노마드들이 업무 수행을 위해 이용하는 유료 작업 공간으로, 영어로는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라고 부른다. 업무용 대형 테이블이 여러 개 놓인 공용 라운지를 중심으로 화상 통화방, 세미나실, 회의실 등의 부대시설을 갖췄다. 개방형 도서관 혹은 대형 카페나 자유분방한 사무실을 연상하면 된다.


우붓에는 두 개의 협업 공간이 있었다. 하나는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로 불리는 번화가의 협업 공간, 다른 하나는 후발 주자로 출발해 이제는 세를 꽤 확대한 지역 외곽의 협업 공간. 보통은 한 곳을 선택해 멤버십을 등록하지만 초기에 디지털 노마드 문화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파악해 둘 요량으로 두 곳 모두에 한 달 멤버십을 등록했다. 이로써 양쪽을 아무 때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생활에 필요한 기본 환경은 어지간히 조성한 셈. 이제 일상에 집중할 일만 남았다.




# 생활환경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

생활환경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 이상으로 일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일상의 향방을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활환경과 내면세계가 서로 연동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식과 감각에 변화를 꾀하기 위해 새로운 환경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니는 자유여행과 달리 한달살기, 교환학습, 어학연수 등 한 곳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여행에서는 고정된 환경에서 패턴화된 생활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활기찬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생활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환경을 자신의 특성에 맞춰 최적화할 필요가 있다. 가급적이면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게 좋다. 안정된 환경을 기반으로 그날그날의 일과를 충분히 곱씹고 소화하는 생활을 이어가면 목적한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생활환경이 현실 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드러내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운동을 시작하고 일정 시간이 지나야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유산소 운동과 비슷하다. 때에 따라서는 나처럼 일련의 과정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환경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자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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