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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간 Sieben Stunden

8.타인의 꿈을 듣는다는 것은-1)

by 언젠가

그는 일생의 많은 시간을 바쳐서 사회학의 한 분야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아낸 사람이다. 그의 논문을 보면 그 개념은 명료하고 그의 지향점은 아름답다.

그가, 철학과 신학 그리고 가장 진보된 사회복지의 시스템이 갖춰진 나라에서 그 모든 것을 깊이 있게 아우르는 연구에 많은 시간을 바쳐 완성한 논문을 설명하며 그 연구 성과를 한국에 가져가서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적용시키고 싶다는 꿈을 설명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다른 때 보다 더 많이 들떠 있었다.

연구 주제와 성과 자체가 그 사람을 말해준다. 그는 이 승냥이 같은 세상에 보드라운 꽃을 심고 싶은 사람이고 그의 지향을 봤을 때 그 사람의 결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이 된다.



나는 새로운 여성과 교류할 때는 그녀의 헤어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새로운 남성과 교류할 때는 그의 머릿속이 궁금한 사람이다.

여자가 남자의 머릿속과 지갑 속 바지 속이 궁금해지기 시작하면 아마도 그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 핵심개념인 그의 연구 논문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자 지갑 속과 바지 속은 하나도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끌렸지만 반대로 현실적인 고민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좋아, 아름다운 주제와 치열한 노력으로 도출한 결론. 그리고 그 성과를 한국에 적용시키고 싶다는 꿈까지 아주 환상적이야.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다른 면을 봤다. 학자의 길을 걷고 난 후 자신의 연구를 현실화하는 길은 여러 가지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겠고, 이공계 박사라면 바로 기업체나 연구소에서 수치로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그는 분명히 그의 연구 결과를 학문적인 틀을 다지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도 아니고 기업체나 재단에 연구원으로 가서 수치로 도출할 수 있는 과정의 청사진을 그리는 것도 아닌 스스로 직접 자신의 재단을 만들어 본인이 직접, 실천적으로 현실에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 오랜 시간 인문학자이자 사회학자로 살아온 사람이 상아탑도 아니고 연구소도 아닌 사회의 가장 말단에서 스스로 직접 논문의 결과를 현실화하려고 한다면 엄청난 조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의 꿈의 주제 자체가 한 국가시스템의 일부, 적어도 지자체, 기업이라면 삼성복지재단 정도 되는 재단의 힘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을 본인 스스로 직접 시도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면 그의 옆에서 그의 꿈을 도와줄 수 있는 배우자는 아주 헌신적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중년의 싱글 가장 여성이 가장 찾아내기 힘든 것을 가진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 사람이다. 남자의 지갑 속과 바지 속은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겠지만 남자의 머릿속이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줄까?


이혼 후 나는 내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거듭했다.

단순히 전 남편과의 결별이 아닌 이 사건 이후의 나의 인생 전반, 살아가고 싶은 방향, 일상의 양식까지 모두 바뀌어야 하는 혼란의 시기였다.

이혼한 싱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능력이다.

아마도 불행한 결혼 생활을 계속 유지하는 여성들이 있다면 가장 큰 이유는 경제력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이혼을 실행할 수 있는 여성의 이유도 경제력 때문이다.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지독히도 건조하고 무거운 일이다.


둘이 벌던 실소득이 반으로 줄었지만 그 소득에 맞춰 아이들의 교육비는 지출되어야 하기에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하고 현실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 당장 일상은 나의 혼자만의 수입으로 꾸려 갈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줄어든 수입에 맞춰서 일상의 조그만 틈도 생기지 않도록 타이트하게 지출을 통제하며 새로운 소득을 만들기 위한 투자를 하고 공부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었다. 아마도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바로 가능한 실용학과, 적어도 기계공학과나 전자공학, 혹은 의치한수를 선택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과 다르게 문과 쪽으로 진로를 틀고 일반 학사 과정이상의 교육과정을 꿈을 꾸고 있는 큰아이의 길어질 교육기간을 고려하면 더욱더 생각이 많아졌다. 손재주 있고 미적인 감각이 있는 둘째 아이의 진로 방향까지 고려했을 때 일반적인 교육과정보다 더 들어갈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비할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야 하고 아이들의 교육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나면 금방 닥칠 나의 노후까지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무서운 건 그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계획하고 혼자 현실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 수많은 오류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이상 오류가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다. 다행히 내가 가진 자원과 미래의 가능성까지 다 끌어왔을 때 나 혼자 아이들 둘을 책임질 수 있겠다는 결론이 났지만 여기에서 이제 더 이상의 능력은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누군가를 다시 만난다면 적어도 경제적인 부분에서 굉장한 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부분에는 내 능력과 조력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였으면 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대비가 되있어서 내가 경제적으로 기댈 구석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기대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기혼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럴 수 있는 여성들을 볼 때마다 저런 여자들은 어떤 느낌일지 늘 궁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잠든 깊은 밤. 일곱 시간 시차가 나는 지구 저 반대편 그곳에서 낮을 맞이하고 있는 어떤 남자가, 현실에 찌든 싱글 맘이 아닌 여성 그 자체. 동반자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희망이 담긴 대상으로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머릿속을 꺼내 놓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건 너무나 설레고 짜릿한 일이었다. 남자의 꿈을 듣는 것. 그리고 그 꿈이 너무나 귀하여 현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것. 그건 분명 보통일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에 찌든 중년의 아줌마의 마음 속 깊이에서 저 아름다운 꿈을 현실화 시켜주고 싶다는 위험하고 사치스러운 생각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였다.


그래서 그날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당신의 바램과 이상은 너무 아름답다. 그런데 그 이상을 현실화 시켜주려면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배우자가 필요할것 같다. 마치 정치인의 부인, 목회자의 부인, 운동선수의 부인들 처럼 남편의 큰 비전을 위해 자신은 참고 자신을 낮춰야 하는 것이 숙명인 배우자. 물질적인 것은 바라지 않으며 헌신과 사랑을 바칠 수 있는 배우자. 그런데 나는 남자를 위해 나를 낮추고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나는 내 길과 영역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다. 내가 찾는 남자는 그저 평범하다. 경제력과 체력을 갖춘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 현실의 진짜 나를 보여주었다.

사치스러운 꿈을 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할 정도로만 꿈꾸고 싶다. 아름다운 이상을 가진 숭고한 남자보다 부인을 만족시킬 줄 아는 평범한 남자를 원한다.


그날 그의 오랜 연구의 시작과 끝 그리고 아름답고 이상적인 비전까지들었던 그날.

우린 오랜 시간동안 통화를 하여도 한번도 오디오가 빈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그는 긴 침묵으로 반응했다.

어쩔 수 없다. 그가 이상화하고 그 나름으로 규정했던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기에 그에게 나란 사람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중년의 돌싱 아줌마는 남자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긴 시간 기다려야 하는 건 원치 않는다. 적어도 내가 애써 지키고 이룬것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더 나아가서는 꿈을 이루고 물질을 이룬 사람이 그 성과를 나와 나누는 것은 환영한다. 우리의 관계가 단절 되더라도 그에게 실제적인 나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이상화한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실제적인 나를 보여줘야 하는것이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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