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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간 Sieben Stunden

11.우리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by 언젠가

나의 글을 보고 나를 이해하였고 본인과 나는 아주 닮은 사람이기에 친구가 되고 싶다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자 우리는 서로 신뢰하고 공감하며 많은 정보를 나누고 긴 시간 대화하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지구 반대편에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생의 한 부분도 연결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이렇게 닮은 점이 많구나 싶어 놀라는 관계.


관계를 정의하고 규정하고 싶지 않다.

그는 곧 귀국이 예정되어 있고 아마 필연적으로 우리는 만날 것이다.


처음에 그에게 편안히 빠져들 수 있었던 건 사실 우리의 거리가 물리적으로 멀기 때문이었다.

그가 위험하고 알 수 없는 사람이라도 나는 물리적으로 안전하다.


한국에서 여성이 연애를 시작할 때 두려움 없이 백 프로 남성에게 빠질 수 있기란 쉽지 않다. 안전한 연애란 좋은 관계를 유지하다가 서로 인연이 아닌 것 같을 때 관계 끝에 대한 합의와 수용성이 보장되는 연애다. 연애는 유혹적이지만 내포하는 위험요소도 많다. 어쩔 수 없다. 현실에서 보이는 수많은 데이트 폭력, 안전이별에 대한 염려. 이게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와 친구가 되어도, 나의 많은 개인 정보를 그에게 알려도, 그래서 수많은 취약점이 개방되더라도 그는 그것을 빌미로 나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 관계가 기꺼웠다. 십 대들처럼 전화로, 카톡으로 하는 연애가 지금의 내 상황에서는 부담 없고 적절하고 안전하다 여겼다.

그런데 관계의 어느 지점이 지나고 신뢰와 애정이 쌓이게 되니 그 사람의 실존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이 피어오른다. 아주 신기하게도 그는 아주 적절하고 올바른 타이밍에 귀국이 예정되어 있다.


이 관계의 끝이 무엇일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현시점에서 이 관계가 무엇인지 규정하고 싶지 않다.

단순히 전화통화를 하는 사이 카톡을 주고받는 사이 한국과 독일 먼 거리를 사이에 둔 롱디 정도로 끝날 수도 있고 예정된 만남 후에 발전적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모든 걸 구조화하고 예측하고 계획 세우는 것이 편안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생의 가변성을 수없이 겪어 봤기에 변하지 않는 것은 절대 없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 진리임도 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만 만끽해 본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후의 계획을 짜지 않고,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순간을 즐겁게 살아나간다.


나는 아주 많이 변해간다. 그 변화가 너무나 기쁘고 만족스럽다.

새로운 지평을 여는 관계, 서로를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관계, 때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관계.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어도, 긴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여도, 이런 관계를 성립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나는 아직 젊고, 여성으로의 매력도 충만하다. 나와 자녀에 미래에 대한 대비도 되어 있다. 연애를 시작하고 싶지만 결혼이란 현실이 바꿀 수 있는 수많은 역학들이 존재하기에 그걸 고민하기엔 지금 이 상태가 만족스럽다. 희미하게, 자녀들은 곧 내 품을 떠나게 될 것이기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다 생각한 적이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회공학을 연구한 박사가 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지금은 알 수 없다. 이 사람일 수 도 있겠지만 아닐 수 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아니 예정된 시간 뒤에 이 사람을 만날 것이고 만나보면 확신이 들겠지. 아무튼 그날이 오기를 기쁘게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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