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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간Sieben Stunden

18.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by 언젠가


그의 귀국이 다가올수록 그와 나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편적인 정보들을 끌어 모으고 서로의 언어에 의지하며 서로의 실체를 상상했었다.

다른 시간대에서 살아가며 서로의 다른 수면시간을 제외한 남은 시간, 그중에서도 일상을 살아가고 자녀들을 돌보고 각자 자기의 위치와 현실 안에서 해야 하는 업무들을 보다가, 겨우 겨우 그 작은 틈을 찾아내면 통화나 카톡을 하며 서로의 존재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분명히 서로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고 있지만 실체는 옆에 없다.


그를 알게 되면서 독일이란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가 읽는 책과 그가 듣는 음악을 알게 되면서 서로의 세계는 확장된다.

둘 다 바흐를 좋아하는데 나는 골든베르그 변주곡은 글렌굴드라는 북미권 피아니스트의 연주곡을 좋아했다. 그는 당연히 독일 연주자들을 선호했다. 그럼 나는 그와 통화 후에 애플뮤직에서 그가 언급한 독일 피아니스트들의 연주곡을 찾아서 들어본다.

이런 식으로 우린 서로 좋은 것을 공유하며 서로의 세계를 확장시켜 갔지만 정작 중요한 본체인 서로의 실존을 느끼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기에 서로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출장을 다녀온 날 평소와 다른 스케줄 대로 움직이게 되었고 그는 지인과 모임이 있어서 평소에 편안히 통화하던 시간에 통화를 할 수 없게 된 적이 있다.

우린 통화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겨우 서로의 틈을 찾아 전화를 시도했는데 통신상태가 별로여서 대화가 자꾸 끊어졌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 하면 대화 중에 서로의 자녀들이 끼기도 했다.


그는 우리의 이런 불완전한 교류를 시작할 때 자신의 마음과 정신과 몸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늘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셋 중 하나는 보내주겠다고. 나는 그중에 몸을 가장 원했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포기했다 그런데 그가 장담한 것처럼 떨어져 있어도 이상하게도 늘 그의 마음과 정신은 내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고 이 불완전한 교류만으로도 늘 충만하다고 여겼다.


그날, 평소와 다르게 통화가 어려웠고 대화의 맥이 자꾸 끊기던 날.

처음으로 불만이 생겼다. 그리고 롱디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답답하고 갈증 나는 과정을 참을 수 있었던 건 그의 귀국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점점 만남의 날과 장소와 시간이 구체화 될수록, 그 만남 이후에 서로의 거취를 이야기 할 수록 점점 현실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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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