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우리의 환우회.
한 명의 배우자에게 충실하겠다는 약속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
그 계약을 파기한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전생의 실수는 너무 어린 시절 너무 물정을 모르고
맹렬히 다가오는 사람이 사랑인 줄 알았다는 것. 그리고 계약이란 깨면 안 되는 것인 줄 알고 살아온 것,
그 과정에 서서 상대와 갈등과 불만이 생긴다면 다툼이 싫어 회피하거나 포기해 버리고 내가 참으면 된다 하고 살아온 것. 결국 그게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자 그냥 놓아 버린 것.
그리고 그 이후로도 수시로 몰려오는 회한이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정말 좋은 사람이 다가와도 아직 때가 이르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 감정이 정리가 안 돼서 정말 좋은 사람을 놓치게 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결국 전생이 지워지고 현생을 살아가려면 필요한 건 시간이다.
문제는 그 시간을 오롯히 혼자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인 건 그는 훌륭한 조력자이고 상담가이고 지도자였다. 그래서 어디서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부분들. 전쟁 같은 시간을 지나오고 난 이후 어떤 시점에서 문득 드는 어떤 감정들에 대해 상담이 가능했다. 특히 전 배우자에게 느끼는 원망 그렇지만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망설임 같은 양가감정들 같은 걸 물어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객관적으로, 어떤 부분에서는 아주 주관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개입하며 상담해 줬다.
그 과정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혼후에 현실적인 혼란이 너무 커서 감정적인 혼란을 돌아보지 못한다. 그런데 사실 이건 아주 큰 문제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조 모임에 대해 생각했다.
암이나 1형 당뇨 같은 평생을 관리해야 하는 질병을 진단받고 나면 다각도에서 다방면의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절망의 과정을 거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이후에는 내 몸과 건강을 잘 달래고 잘 관리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때 가장 많이 도움을 받는 건 물론 명의에게 수술받는 것. 그런데 그다음은 환우회 같은 자조모임이다.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조언과 정보는 얼마나 가치 있고 따스한지. 암을 이겨내며 평생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실제적 정보를 주고 정서적 지지를 주는 건 그 암에 걸린 사람들이다. 우리는 말로는 타인을 이해한다 말하지만 실제 그 경험 없이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 맘을 알고 크게 마음을 다친 사람이 그 마음이 다쳤을 때 어찌해야 하는지 조언해 줄 수 있다.
그에게 내 마음의 혼란과 갈등까지 다 이야기하고 이런 감정이 언제나 사라질지 물어본 적 있다. 그는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을 가져오기도 하며 성실하게 조언해 줬다. 긴 통화가 끝난 후 그에게 노래가 하나 왔다.
존박의 이상한 사람(foolish love)
-그댄 나를 또 한 번 긴 꿈을 꾸게 해 안 다쳤던 어린 날처럼
조심스레 또 한 번
설레는 맘이
사랑인가 봐-
안 다쳤던 어린 날을 회상시키며 꿈을 꾸게 하는 것.
그것에 대한 공포, 어쩌면 비관적인 조소를 가지고 있던 나는 사실 그걸 가장 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난 우리의 환우회에서 좋은 환우를 만났고 좋은 정보를 얻고 치유의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