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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시간

20.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by 언젠가

그와 두 달가량 교류가 지속하는 동안 그의 귀국 후 계획, 미래에 대한 준비 같은 청사진들을 듣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귀국 이후 한국에서의 삶에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많은 것들을 함께 하고 개입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어떤 부담감이 또 다른 무게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혼자 많은 것을 해 왔고 혼자 일상을 처리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이제야 그 편안함에 적응되고 있는데 누군가와 그 시간을 나누게 될 수 있다고 여기자 생각이 많아졌다.


실제로 그를 만나면 어떨까?

이렇게 시차를 두고 거리를 두고 친구처럼 연인처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감하고 위로받는 이 시간들이 끝난 후에 실제로 만나 실존을 확인하고 기대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 기대했던 것과 불일치하는 것을 찾아낸 이후에 관계는 어찌 될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들었다.

전화통화이지만 한 번도 서로의 거리를 인식한 적이 없을 만큼 친밀하고 다정했었던 대화가 마지막에는 어긋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와 만나고 그 이후의 일들이 어떻게 펼쳐질까 상상하니 그동안처럼 편안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의 귀국날은 정해졌고 우리가 만나게 될 날도 정해졌다.

그날을 위해 피부과를 예약해 시술도 받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던 몸을 가꾸기 시작했다. 그날 뭘 입고 어떤 첫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그동안 연애 휴식기 상태에서 다시 연애기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지만 이젠 그런 것들 조차 귀찮을 나이. 연애를 하면 분명 노력하고 더 가꾸고 예뻐지긴 한다. 활력도 돌고. 그런데 나는 이미 중년의 나이. 이젠 그런 활력이 과연 필요할까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날 뭘 입고 어떤 첫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서 가장 유명한 이중창, 저녁 바람이 산들 하게. 이 노래는 많은 영화, 드라마, 광고에 쓰였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가 간수를 화장실에 가둬놓고 이 노래를 교도소 죄수들이 들을 수 있도록 방송으로 틀어주자 수감자들이 잠시 멈춰 이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이며 예술의 위대함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한다. 그와 대화를 하며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아리아가 이것이라고 저녁바람이 산들 하게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이 곡을 찾아서 들어보겠다고 했다.

그와 첫 만남은 아리아 저녁바람이 산들 하게 처럼, 그렇게 아름답고 산뜻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었다.

그런데 현실은 모차르트가 아니라 TWS였다. 첫 만남을 너무 어려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 정말 그 가사 그대로였다.


첫 만나는 날 나는 주차장을 잘못 찾아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그만 갇혀버렸다. 주차장의 입구는 좁고 내가 주차한 위치는 애매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후진으로 전진으로도 도저히 뺄 수 없었다. 꼬마 건물의 작은 주차장이 대부분 그러하듯 실제 사용하는 차량 몇 대만 주차가 되게 설계된 데다가 그곳에는 그 건물의 사용자가 창고로도 사용하는 것 같이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있어서 그것들을 건드리지 않고는 도저히 차를 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실제 그 건물 사용자의 차량이 들어오며 , 감히 내 주차장에 차를 이렇게 기묘한 위치로 대놓고 버티는 너는 누구냐며 운전석에 앉아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나에게 차를 얼른 빼라고 재촉했다.

초여름 저녁 바람처럼 산들 하게 그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는데 나는 결국 그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당신이 알려준 건물 옆건물에 주차를 한 거 같은데 못 나가고 있으니 찾아와서 내 차 좀 빼주면 안 되냐고..


낯설고 컴컴한 건물 주차장에서 오도 가도 못하며 , 내 차 앞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어떤 모르는 아저씨 앞에서 한껏 주눅 들어 쩔쩔매고 땀 흘리며 운전석에 앉아있는데

저기 룸미러로 그동안 사진으로만, 영상통화로만 보던 남자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손 흔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운전석을 열고 나에게 내리라고, 내가 빼주겠다고 하며 다정하게 내 볼을 감싸 쥐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그를 처음 보자마자, 저 멀리서 웃으며 내차로 걸어오는 그를 룸미러로 확인하자마자 긴장감과 짜증이 사라졌다.

나는 저절로 알았다. 그와 만남을 위해서는 피부과 시술을 받으며 준비할 필요도 없고 오페라 아리아의 느낌을 연출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돌아보니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 안심을 주는 존재였다. 그와 이야기를 하며 단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미심쩍거나 하는 부분은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준비하고 있고 불확실성이 더 많은 도전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독일에서의 삶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오면 지금까지 그가 했던 연구 지향했던 삶과는 다른 방식의 인생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최종지향은 그의 연구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대로 이지만 그 지향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그는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물질론적인 방법으로 그 지향을 현실화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순점들이 나는 그동안은 조금 미심쩍었었다. 사십 년을 공익을 위한 지향점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 그 지향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방법론으로 가장 개인적이고 물질적이고 차가운 방법의 투자를 시작해서 자본을 마련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투자를 위해 귀국을 한다는 사실이 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를 처음 보자마자 느꼈다. 그는 어떤 기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첫 만나면 어떤 말을 처음 하게 될까 하고 그동안 상상했었는데 결국 그가 땀 흘리며 허둥거리는 나에게 처음으로 건넨 말은

" 괜찮아 내가 차 빼면 되지"였다.

어쩌면 이게 지난 두 달 동안 기다려온 말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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