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이야기

48번 국도

by 언젠가

나의 해방일기에 나오는 산포시를 보면 내 고향 김포가 떠오른다.

사실 서울은 노른자 경기도는 흰자라는 말도 경기도민들은 다 공감할 것이다.

출퇴근을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소진한단 말도

경기도민들은 다 뼛속 깊이 느끼며 생을 살아간다.


학교는 무조건 서울로 다녀야 한다는 엄마의 신념에 따라 나는 경기도민이었지만 서울의 초등학교로 통학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에 가기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소진하게 되는 통근 혹은 통학 여정으로 내 유년기 모든 기억은 채워졌다.

초등 2학년, 주머니엔 토큰 두 개를 넣고, 무거운 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서울의 다른 아이들은 아직 잠을 자고 있을 시간에 나는 길을 나서야 했다. 그 당시 김포에서 방화까지 버스 노선은 단 2개. 아침 일찍 가방을 지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목을 빼고 하염없는, 마치 영원과 같은 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린다. 배차간격도 엉망인 노선이지만 그 버스는 김포에서 서울로 출근하거나 통학하는 사람들로 늘 가득 찼다.

6번과 130번. 배차간격은 30분 정도. 아직도 눈을 감으면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내달리는 내 어린 시절 뒷모습이 보인다. 지각을 하지 않으려면 아침에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고려하고 남들보다 서둘러야 한다. 그때는 전화기도 버스도착 시간 앱도 없었기에 그냥 버스정류장에서 목을 빼고 있는 수밖에 없다.


운이 좋아서 앉아서 가면 다행이지만 그런 운은 잘 없었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비 오면 비 맞고 그렇게 학교에 도착하면 이미 지쳐있었다. 뜨는 해를 느끼며 집을 나섰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그네 같은 학창 시절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산다는 건 힘든 일이고 왜 나는 어디론가로 흘러가는 부표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싶었다.


돌아보면 늘 생각을 하고 홀로 상념에 사로잡히는 습관이 붙은 건 아홉 살부터 시작된 그 버스에서의 시간들 때문이다. 나는 48번 국도에서 커갔다. 130번 버스에서 영원의 시간을 보낸 것 같이 나이 들어갔다. 친구들 다 있는 워크맨 같은 물건들은 공부에 방해된다고 엄마는 절대 사주지 않던 시절의 나는 음악도 없이 그저 멍하게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생각들을 하며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나는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보다 머릿속으로 멍하게 생각하는 편이 좋고 그 생각을 말보다는 글로 전달하는 게 편하다. 아홉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 때까지 하루 두세 시간 이상을 매일 버스에서 보내며 자라온 사람은 그렇게 된다.


김포 시민이었던 나는 통학버스를 타고 자라나서 통근버스를 타는 성인이 되었다. 흰자위에서 노른자위로 가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야 하는 사람들.

집이 같은 방향의 애들은 삼삼오오 손을 잡고 친구들이랑 하교하는데 나는 터덜터덜 혼자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오곤 했다. 학교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또 왜 이리 멀리 있는지. 지금 보면 초등학교에서 김포 가는 노선이 있는 역 까지는 일 킬로도 안 되는 거리지만 아홉 살의 발걸음으로는 너무나 먼 여정이었다. 방과 후에 친구집에 놀러 가는 일이나 내 집에 친구를 초대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와줄 친구도 없고 김포에서 서울로 통학을 하던 아이들은 다수가 아니었기에 다수의 방화동 아이들로 구성된 반에서 김포에서 오는 애들은 촌뜨기라고 놀림받곤 했다.


내 학창 시절은 외롭고 길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시간 대부분 나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거나 운 좋게 버스 자리에 앉으면 꾸벅꾸벅 졸거나 하며 보냈다. 영등포역이 기점으로 강화까지 들어가는 광역버스인 6번 버스는 요금이 더 비싸서 잘 안 타고 다녔다. 요금도 비싸고 종점이 저 멀리 강화까지 가는 버스라.

어느날 그 광역버스를 탄 하굣길에 너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다가 강화도로 가는 어느 기점, 섬을 들어가야 하는 검문소, 서해안 뻘밭으로 무장 공비가 나온다는 곳까지 들어간 적도 있다.

졸다가 놀라서 일어나 보니 이미 해는 져서 사방은 껌껌했다. 모르는 동네, 어느 시골 구석진 도로에서 덩그러니 내려졌던 아홉 살의 나.

어둡고 외롭고 무섭고 외진 곳. 강화에서 김포시로 나오는 서해안 바닷가 접경의 어떤 시외버스 정류장 그곳에 서서 두리번거리며 버스를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르면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밀려온다.

아마 돌아서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정신 차리고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길에서 내내 울고 있었다면 엄마는 나를 멀리 통학이 필요 없는 김포의 학교로 다시 전학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어딘지 모르는 외딴 49번 국도의 어느 버스정류장에서 공중전화기를 찾아 집으로 전화를 해서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는 이학년이나 되었으면 버스 정도는 다시 타고 돌아올 수 있다며 침착하게 길을 건너서 반대편 버스 정류장에 가서 다시 같은 버스를 타고 돌아 나오면 된다고 했다. 엄마는 너를 데리러 갈 수없으니 네가 알아서 정신 차리고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다시 와야 한다고.

무장공비, 엽기토끼, 홍콩할머니 귀신 머릿속으로 온갖 무서운 생각을 하며 외딴 버스정류장에 서 있던 나. 어딘지 모르는 외진 곳. 아무도 없던 그곳에서 그래도 무슨 무슨 납치나 사건 사고에 노출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아홉 살의 몸 만한 가방을 짊어지고 있던 나.

지금 내 아이가 초등 저학년인데 내 자식을 보면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아기 같다. 우리 엄마는 어떤 사자의 심장을 가졌길래 삼 남매를 통학시켰을까? 내가 살아보니 안다. 엄마는 사자의 심장을 가졌던 게 아니다. 엄마는 가게문을 여는 게 중요한 상황 이었던 것이다. 애들을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을 통학까지 캐어해 줄 수 없이 일을 해야 했다. 보통은 그렇다면 포기를 하는데 엄마는 자녀들이 내 자녀들이 똑 부러 진다는 신념 (똑 부러 지지 않았다. 그냥 어린이였다)과 서울로 보내면 그래도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통학을 시켰다. 엄마에게는 삼남매가 잘 교육받아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해주는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였다. 하지만 남다른 교육을 시킬 수도 없고 사교육을 시킬 수도 없다. 공교육 과정안에서 엄마가 생각하는 우리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의 최고봉은 전문직이 아닌 공무원이였다. 엄마는 현실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내 자식들이 조금 똘똘하긴 하지만 그렇게 까지 뛰어나지 않다는것. 교사나 공무원같이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 된다 여겼다. 교수나 변호사나 의사 같은 더 먼길을 가게 해주려면 뛰어난 아이의 성향과 부모의 지독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주 일찌감치 알아서 우리에게 더 먼길까지는 가게 하고 싶지 않아하셨다.


가까이 있고 안전한 학교의 학군이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나은 학군으로 보내고 싶지만 그 뒤까지 봐줄 수는 없을 땐 자기 자신과 아직 어린 자식에게 너희는 스스로 할 수 있어라고 가르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독수리가 새끼를 날아오르게 하기 위해 둥지에서 밀어내는 것처럼 엄마는 나를 밀어냈고 나는 작은 날개지만 어떻게든 바둥거려서 떨어져 죽지 않았다. 엄마의 지시대로 터널 터널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긴 여정을 마치고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아홉 살이나 되었으면서 버스하나 제대로 못 내리냐고 나무랐다. 자리에 앉아도 절대로 잠들지 말고 정신바짝 차리라고 호통쳤던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만나면 왕 하고 울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던 게 무안하게 눈물이 쏙 들어가서 앞으로 버스를 탈 때는 더 정신 바짝 차려야지 다짐했다.


하루의 두 시간을 그것도 그래봤자 강남 8 학군도 아닌 서울에서도 끝자락인 강서구 그냥 그런 학군으로 아침 일찍 깨워 토큰 두 개를 쥐어주고 내보낸 우리 엄마. 학교가 싫은 게 아니라 학교 가는 그 자체가 고역이고 힘들었지만 다른 선택 따위는 몰랐으므로 그냥 묵묵히 통학했던 우리는 묵묵히 자라나서 지금도 묵묵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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