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 아빠는 김포 토박이로 김포가 아니면 세상의 끝인 줄 아는 사람이다. 친정 아빠의 기준에서 김포는 우주의 중심이다. 그 외의 동네는 살 곳이 못 되는 곳이다.
내 유년기와 학령기는 김포군에서 서울시로 통학을 하면서 끝나버렸다.
삼 남매가 매일 두 시간씩 왕복 통학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사를 고려할 법도 한데 아빠에게 김포 이외의 동네는 마치 낭떠러지와 같았다.
우리 아빠에게는 지금 내가 자녀를 키우기 위해 집을 마련할 때 학군을 고려하거나 생활권을 고려하거나 하는 것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부동산이란 투자와 사고팔고의 개념이 아니었고 내가 사는 곳이란 그냥 내가 나고 자란 곳이지 상급지 하급지의 개념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삼 남매를 교육시키는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그래도 아이들은 서울로 공부를 하러 가야 한다 주장하셔서 나는 아홉 살, 초등학교 이 학년 때부터 왕복 두 시간 동안 서울의 끝자락, 공항동으로 통학을 했다.
김포의 교통사정이 내가 그곳을 떠난 후로도 계속 개선되긴 했지만 사실 삼십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엔 아주 후지디 후졌다. 서울로 가는 딱 하나의 국도는 이차선이었고 지금의 사우동(그 당시 사우리)에서 공항까지 가기 전에 중간 기점인 고촌은 천둥고개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이야 평탄화된 넓은 도로로 변했지만 나 어린 시절 그 천둥고개는 정말 말 그대로 호랑이가 사는데 호랑이 울음이 천둥소리 같다는 유래만큼 구부렁구부렁 고갯길이었다. 버스를 타고 그곳을 넘어갈 때는 비위가 약하던, 아침 일찍 무거운 책가방과 신발주머니와 각종 준비물을 가방에 짊어지고 있던 초등학교 이학년, 아홉 살의 나는 늘 멀미를 하곤 했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을 왕복 두 시간, 스쿨버스도 아닌 시내버스에 태워 서울로 보낸다는 엄마의 결심은 사실 유별난 게 아닌 게, 그 당시 김포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없고 농업 고등학교만 있었기에 교육열이 조금 높고 아이들이 조금 빠릿빠릿하다 싶은 김포의 학부모들이 한 번쯤은 고민했던 선택이었다. 그래서 강서구 방화동과 공항동에 판로를 둔 우유나 신문 배급소의 주소지는 위장전입한 김포 아이들이 한두 명 많게는 아홉 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내 고향이자 친정인 그곳은 작은 소읍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 편입되네 마네하는 이슈로 핫해졌지만 그곳은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로 유명한 농경지였다. 그리고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서울까지 접근성은 떨어진다. 특히 부동산 가격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바로 미터인 강남까지의 접근성은 매우 떨어진다.
김포에서 나고 자라 강서구까지 하루 왕복 두 시간을 통학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고 고등학교 시절엔 아침 일찍 거의 첫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서 야자를 하고 막차를 타고 집에 왔다. 공부를 하는 자체보다 학교에 가는 자체가 힘들었다. 직장인이 되고부터는 돈을 벌고 일을 하는 자체보다 직장에 가는 자체가 힘들었다. 핵심이 아닌 주변으로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은 직주근접을 못 이룬 경기도인의 숙명인 것인가?
사회에 나가서는 직장이 강남이었는데 그때는 하루 왕복 네 시간을 출퇴근에 쏟아부었다.
그나마 지금은 골드라인이 있지만 내가 직장을 다닐 때는 지하철이 없어서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했다. 이호선- 오호선- 김포 들어가는 시내버스의 무한 루프를 타다가 작은 첫 경차를 샀을 땐 드디어 나도 편한 인생을 찾나 싶었는데 어차피 출퇴근 시간엔 강변북로도 밀리고 올림픽로도 밀려서 출근은 새벽에 퇴근은 밤늦게, 거의 고등학생때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래서 결혼이전까지 내 기억의 대부분은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서서 졸거나 앉아서 졸거나 졸다 일어나 크게 하품을 하면 아직도 멀었네 싶어서 지루해하거나 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강남까지 접근성은 이렇고 김포시청에서 비교적 접경지인 강서구 공항동이나 산업단지가 구성되어 일자리가 많아 강서구의 알짜라는 마곡동까지 접근도 버스로 삼사십 분, 그 악명 높은 골드라인 지하철로도 이십 분 이상소요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빠를 비롯한 토박이 김포사람들은 다들 갑자기 왜 우리가 서울시민이 되지? 하고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흰자위 경기도민으로서 노른자위 서울까지 접근하는 삶을 사는 동안 김포는 시가 되고 신도시가 되고 점점 확장되어 갔다. 하루 네 시간을 출퇴근하는 주변인의 인생을 살다 보면, 여름엔 출근도 전에 더위에 늘어지고 겨울엔 퇴근도 하기 전에 추위에 쪼그라들어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방출하는 삶을 살다 보면, 출퇴근에 많은 기운을 쓰지 않아도 되는 직장 근처 강남구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궁금할 때가 많다.
퇴근하는 길에 더욱 그 궁금증은 생생한데, 늘 퇴근하고 회사를 나서면 집으로 향하는 먼 여정을 떠나지 않아도 그냥 이곳에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쉴 집이 있다면 얼만 좋을까 싶을 만큼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에너지를 써서 나는 또 집으로 향해야한다.
직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거나 독립을 하지 않은 이유는, 사회초년생 내 월급과 신용으로는 내 직장 근처에는 개미 콧구멍만한 안전한 월세방도 구하기 힘들고, 내돈으로 월세라도 구할 수 있는 곳은 안전과도 거리가 멀고 이미 강남권과도 멀어져서 어차피 출퇴근하는데 에너지가 드는거 먼 김포에서 다니나 조금 먼 강서나 강북에서 다니나 그럴바엔 엄마가 주는 집밥 먹으며 다니자 싶었다.
부모님은 딸의 독립이란 시집가는 것 뿐이 없고 힘든 출퇴근길에 녹초가 되서 서울로 가고 싶다는 딸에게 독립을 하고 싶으면 차라리 시집을 가라고 주장했다. 내가 빨리 결혼을 하여 김포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더이상 길에다 내 인생을 쏟고 싶지 않다! 이거였다.
성모병원, 센트럴 시티랑 반포자이의 위용이 느껴지는 반짝이는 그곳을 나와 올림픽도로를 지나 일산/ 김포 IC를 향해 가다 어느덧 사위가 컴컴하고 아무것도 없는 김포로 들어가는 딱 하나 있는 국도를 들어가면 주변엔 오직 논이 펼쳐지고 국도를 지나면 드디어 집에 도착이다. 복잡하고 반짝이는 그곳을 지나 조용하고 어두운 내 집으로 향하는 길을 지나는 동안, 젊은 시절의 내가 부동산이란 무엇일까 강남에 집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주변인이 아닌 중심인이 될까 고민을 계속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아예 다른 도시로 이주해서 사는 동안 그저 우리가 먹던 쌀이 나오는 줄만 알았던 절대 농지 아빠의 땅, 임금님께 진상하는 자랑스러운 김포평야 쌀을 생산해 내는, 대대로 물려내려 온 토박이 우리 아빠의 땅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치 있는 부동산이 되어갔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동산에 관심이 많고 집을 사는 것의 의미와 학군지, 상급지에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많던 나는 부단히 노력했지만 자산가가 되지 못했다. 부동산 공부를 계속하고 주식 투자를 하기도 하고 금투자도 하고 근근히 쫀쫀히 이리저리 노력했지만 남편의 실패는 내 실패가 되어 자산이랄게 쌓이지 않았다.
아빠는, 이제 자산가이시다. 아빠는 그저 그 아무 투자도 하지 않고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그냥 그곳에서 나고 자라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그곳이 절대 우주라 여기며 사셨다. 아빠의 우주였던 김포의 부동산 가치가 상승한게 엄마와 자식들에게 축복인 것일까?
모르겠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