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센티미터, 큰 키에 건장한 체격, 긴 팔다리. 겨울이면 즐겨 입던 검은 정장과 롱코트, 머플러에 안경까지 걸친 신사. 주변 사람들에게 참 친절하고 잘 베푸는 사람이었으며, 오랜 공무원 생활로 얻은 지식을 잘 뽐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좋아했다.
붉어진 얼굴과 팔다리. 흰색 메리야스에 트렁크 팬티. 뒤집어 엎어진 밥상 옆에서 축 늘어져 있는 사람. 그의 폭력성에 아내는 집을 나갔고, 그의 무능력함에 노모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슬하에는 삼 남매가 있었는데 삼 남매 모두 아빠에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위에서 말한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밖에서는 검은 정장의 멋진 신사였지만, 집에만 오면 검은 악마로 변했던 우리 아빠. 그를 악마로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어려운 상황에도 잘 키워놨다고 생각하는 아들딸의 무시였을까. 빚보증으로 인해 찾아온 가난이었을까. 자신과 어린 자식들까지 버리고 간 아내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더 어린 시절의 상처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사의 옷을 입었을 뿐,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엄마가 아빠 사진을 가지고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아빠 사진을 보고 기겁을 했단다. 이런 사람이랑 여태 어떻게 살았냐고.
사실 악마라도 괜찮다.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조금만 더 많이 보여주셨더라면. 아빠를 지금보다는 덜 미워했을 텐데. 아빠는 우리 삼 남매가 가난 때문에 아빠를 싫어하는 줄 알지만 큰 착각이다. 가난은 견딜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아빠였다. 아빠가 사랑한 술, 담배, 노름, 그리고 여자, 모두 우리를 힘들게 했다.
동생은 아빠에 대한 원망이 너무 커 아빠와의 연락을 끊고 지내며, 나 역시도 당분간은 명절이나 어버이날에도 아빠를 찾아뵙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형만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가끔 아빠를 찾아뵙고 있지만, 아빠가 돌아가셔도 눈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아빠에 대한 글을 쓰고 나면, 아빠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냥 아빠를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마음을 '괜찮아...'하고 스스로 다독일 수 있는 힘만 생겨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