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한 아이 이야기

"선생님은 나를 아는데 나는 선생님을 모르겠어요"

by 날필

아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눈 앞의 괴로움을 외면해왔다. 고개를 돌려 다른 즐거움을 찾는 것으로 애써 마음의 짐을 떨쳤다. 그러나 한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생기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괴로움도 직시하지 못하고 즐거움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그런 상태로 어영부영 문제가 해결되기를, 또는 시간이 흘러 저절로 나를 떠나가기를 기다려 온 것이 나라는 인간의 처세다.


허나 자식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미취학기의 아동에게는 엄마의 개입이 필요한 순간이 대부분이고 그러므로 엄마인 내가 문제를 외면했을 때 어느샌가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행운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육아에 요행은 없다. 또, 아이는 나를 떠나가지도 않는다. 물론 시간이 많이 흐르면 언젠가는 그런 순간이 오겠지만(상상만 해도 목이 멘다. 좋아서.)아무튼 그 시간동안은 함께 가야한다. 육아엔 스킵도 없다.


글을 쓰고 싶다. 내게 글쓰기란 오랜 여운을 남기는 즐거움이다. 쉬이 사라지는 오락과는 다르다.


허나 아이는 내 머릿속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실상 아이는 내 생활 전반을 틀어쥐고 있다. 유치원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10월, 아이는 갑자기 극도로 산만하고 과격해졌다. 유치원에 다니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상태였다. 유치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유치원을 그만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6개월 후면 아이가 학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아이가 무사히 진학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혹시 학교에서 아이를 거부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최악의 상황으로 생각이 치달았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닌 마음의 문제였다. 밤에 모니터 앞에 앉아 깜빡이는 커서를 보면 낮에 아이와 있었던 일들, 아이의 행동들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쓰지 못하게 되니 더 강렬하게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풀어내지 않고는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우리의 이야기다.


유치원에서 어떤 게 가장 너를 힘들게 하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말했다.

"선생님은 나를 잘 아는데 나는 선생님을 잘 모르겠어요."


선생님이 자기 마음을 읽어주려고 애썼다는 걸 아이도 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나를 잘 안다고 아이는 말한다. 하지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그것을 하는지 혹은 하지 않는지 아이는 도무지 감이 없다. 끊임없이 경계를 알려주는데 아이에게는 그것이 모호하게 느껴진다. 아이는 경계를 모른다. 그래서 아이는 선생님을 잘 모른다.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잘 모른다.


아이를 산만하다고 결론내린 사회, 남들은 자신을 잘 파악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남들이 원하는 걸 잘 모르겠다는 아이. 이런 아이와 사회를 중재하고 성공적으로 연결시켜야 하는 나. 우리의 이야기엔 요행도 스킵도 없다. 차근차근 걸어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매일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가끔은 충격에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어딘가에는 이런 일상을 살아가는 이도 있으며, 누구에게나 일상이 그렇듯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여기에 쓰여졌다는 건 내가 이미 그 시간들을 지나왔으며 글로 풀어낼 수 있을만큼 치유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타인의 지난 고통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하여 본인을 힘들게 하지는 않기를. 혹시 진행중인 고통을 타개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도움이 되기를.


이해받고 싶은 자와 이해하고자 하는 자, 모두에게 손을 내미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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