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고 들어주기
먹는 욕구를 채워주자 아이는 전보다 한결 너그러워졌다. 자신을 화나게 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자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도 그랬다. 살짝만 건드려도 쉽게 쏟아져 나오던 충동적인 언행이 조금, 적어도 엄마인 나는 느낄 수 있을만큼 아주 조금, 수그러들었다. 음식에 대한 제재를 줄인 뒤로 나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 또한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매번 주의 깊게 지켜보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들 쪽으로 귀를 열어두었다.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당시 나는 부엌에 서서, 빨래를 널며, 그도 아니면 혼자만의 작업을 하며 마냥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일이 많았는데 때문에 아이들의 다툼이 늘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와 아이 동생이 무엇을 하며 놀고 있었는지, 그 와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맥락을 알지 못했기에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냐, 연신 아이를 다그치며 숨이 넘어가게 우는 아이의 동생을 달랠 뿐이었다. 제가 동생을 때려 울려놓고는 자기가 더 억울하고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 많은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는 아이. 말하지 않는 아이. 아이의 생각이 궁금했다.
상황 1.
아이가 쌓은 블럭을 동생이 자꾸 무너뜨린다. 처음에는 실수였는데 형한테 몇번 떠밀리더니 이제 아예 다 쌓기를 기다렸다가 작심하고 무너뜨린다. 화가 나서 너무 자연스럽게 손이 나가는 아이를 동생에게서 떼어놓은 뒤 씨근거리는 몸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정이 정말 밉지? 네가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엄마도 옆에서 봤는데 하라 정말 속상하겠다.
"미워. 동생 나빠."
"그런데 잘못은 정이가 했는데 하라가 정이를 때려버리면 네가 더 많이 잘못한 게 되어버려. 그럼 하라 기분이 어때?"
"안 좋아."
"다음번에 정이가 또 그러면 그땐 네가 정이한테 얘기해줘. 형아가 만든 거 무너뜨리지 말라고. 그래도 정이가 말을 안 듣고 그래서 때리고 싶어지면 엄마를 불러줘. 그럼 엄마가 대신 혼내줄게. 그래도 괜찮겠어?"
"좋아."
15개월 동생에게도 형아가 만든 블럭에 허락없이 손대지 말라고, 하나 마나 한 주의를 주었다. 조금도 인상쓰지 않고 대화가 끝났다. 그저 내 말투를 조금 바꿨을 뿐 아이의 반응과 모든 상황이 그대로였는데도 진심으로 짜증이 나지 않았다.
- 1분 경과 -
"저리가! 하지마!"
퍽 우당탕
으아아아앙 와아아아앙 끄아아아앙
이쯤에서 동생의 엄청난 울음소리에 열이 뻗쳐 바로 쫓아가서 동생부터 끌어안아 달래고 아이에게 마구 퍼붓던 것이 기존의 우리집 풍경이다. 평소 같으면 그랬을텐데 아까 아이에게 했던 말이 혀끝에 아직 남아서 '동생이 얼마나 미울까. 말도 안 통하고, 나 같아도 때리고 싶겠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게다가 아이가 때리는 소리는 분명 한번이었는데 동생의 우는 소리는 어째서 삼단고음인가. 동생놈이 또 여우짓을 하는구나.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다.
"하라야, 정이가 왜 우는거야? 정이가 또 이렇게 무너뜨렸어? 그래서 화가 나서 때린거야?"
"내가 화나서 때렸어. 힘들게 쌓았는데 정이가 다 무너뜨렸어."
"정이 이리와봐. 형아가 힘들게 쌓았는데 이렇게 무너뜨리면 형아가 얼마나 속상하겠어. 자 빨리 형아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형아가슴을 토닥이며)냐냐냥(아직 말을 못함)"
"자 얼른 원래대로 해놓고" (라고 동생에게 말하며 내 손으로 열심히 복구시킨다)
다섯살 아이는 <내가 만든 게 다 망가졌다>는 사건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되기 전엔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 얼추 아이의 작품세계를 복원해놓고 아이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싶을 때 아이를 끌어안고 이야기했다.
"이제 맘이 풀렸어?"
"풀렸어."
"정이가 먼저 잘못했지만 정이를 때린 건 하라가 잘못한 것 같은데. 잘못한 거 같아 아닌 거 같아?"
"잘못한 거 같아."
"그럼 정이한테 사과할 수 있어?"
"정이야 미안해."
- 5분 경과 -
"하지마! 저리가!"
으아아아앙 끄아아앙 크헝흐헝
"후우....하라야...."
이 짓을 저녁 내내 세번이나 반복했고.
난 단 한번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면 거짓말이고.
단 한번도 짜증을 드러내지 않았다.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짜증을 싣지 않으려 노력했다. 실제로 평소보다 짜증이 훨씬 덜했다. 상황을 관찰한 덕분에 아이의 마음을 짐작했고 그걸 말로 표현했을 뿐인데 내 감정을 컨트롤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다.
상황 2.
아이는 블럭을 쌓고 동생은 옆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다. 모두의 니즈가 충족된 평화로운 순간, 갑자기 아이가 동생이 가지고 놀던 인형을 훽 낚아챈다. 왜 친형이라는 작자들은 같은 인형을 사줘도 꼭 동생이 들고 있는 걸 탐내는 걸까. 사실 이런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동생은 혼자 잘 놀고 있는데 아이가 괜히 건드려서 기어이 울려놓는 경우.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할까, 순전히 아이의 잘못인데도
"동생 정말 밉지. 동생 욕심쟁이다."
이 방법이 과연 옳은걸까?
잠시 고민이 됐다.
"하라야, 어제 하라가 쌓은 블럭 정이가 와르르 망가뜨렸을 때 하라 기분이 어땠어?"
"안 좋았어."
"정이가 갖고 놀던 인형을 하라가 휙 데려가버리면 정이는 기분이 어떨까?"
"정이야 미안해."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과를 하고 바로 인형을 돌려주는 아이. 전에도 비슷하게 말해본 적이 있지만 히스테릭하게 웃으며 쌩 달려가버릴 뿐,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엔 바로 동생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 감정을 이해했다. 전날 밤 동생과의 다툼에서 엄마가 자기의 감정을 이해하고 들어주었기 때문이었을까?
내 생각보다 훨씬, 아이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였다. 나의 아주 작은 변화 하나에도 아이는 민감하게 반응했고 시간이 걸릴지언정 반드시 화답해주었다. 아이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아이를 부당하게 대해왔던 건 어쩌면 내가 아닐까? 나를 바꾸기 시작하면서 나에 대해 돌아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