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 마음 읽어주기(3)

거절 대신 제안하기

by 날필

아이를 관찰하면서 아이의 행동에도 다 맥락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는 마구잡이가 아니었다. 나름의 이유와 정당성을 가지고 행동했다. 그러니까 내 아들도 계획이 다 있었다! 이 사실을 발견한 게 아이를 관찰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였다. 다만 그 행동이 너무 과격한 방식으로 발현되는 바람에 주로 지적을 받는 대상이 되고 주위의 눈총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과격한 행동은 개선하되 행동의 이유는 인정해주기로 했다. 무작정 아이를 윽박질러 지금 잠시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무런 훈육이 되지 않는다. 나는 훈육의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잔소리는 짧게"

"거절은 길게"


비록 지금까지도 잘 되지 않아 종종 아이가 귀를 막게 만들지만, 이것이 내가 훈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다. "잔소리는 짧게"가 특히 어렵다. 정말 어렵다. "거절은 길게"는 비교적 쉽다. 물론 처음엔 어렵지만 계속 연습하다 보면 어느 순간 힘들이지 않고 성의있게 거절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가끔은 말하다 말고 박찬호 선수가 떠올라서 머쓱해질 정도로 길게 말하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 머쓱하다는 말을 들으니까 생각하는데 머쓱타드라는 말은 참 잘 만든 신조어같다. 그런데 머스타드는 노랗잖아? 아 노랗다고 하니까 또 생각나는데...이런 식으로 말이 많아지는 부작용이 있다. 이런 부작용을 모두 감수할만큼 "거절은 길게"의 효과는 확실하다.


"거절은 길게"란 아이의 요구가 다소 터무니없게 들리더라도 딱 잘라 거절하기보다는 절충안이나 대안을 주어 아이 스스로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엄마에게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 있듯 아이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의 의지를 꺾으려 하지 말고 어른인 엄마가 먼저 뜻을 굽혀야 한다.


상황 1.
쿠키반죽을 직접 하겠다는 아이와 차마 반죽을 내어줄 수 없는 엄마.

자칫 실랑이로 이어지려던 그 순간 식탁에 있던 건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하라가 꼭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쿠키 위에 건포도로 눈코입 만들어줄래?"

아이는 아주 흔쾌히 건포도를 받아들었다. 이 순간 건포도는 평화의 비둘기가 되어 반죽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반죽 위에 얹은 건포도는 비록 오븐 속에서 새까맣게 타버렸지만 애미 속이 타들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모든 갈등상황에 건포도가 떡하니 놓여있지는 않는 법. 일상의 많은 순간에서 아이들은 폭군이다. 한번 시동이 걸렸다 하면 우는 소리로 사람도 죽이겠다 싶을 정도로 억지를 부린다.


상황 2.

처음 보는 공룡이름을 격렬하게 알고 싶은 아이와 파충류가 지긋지긋한 엄마.

"엄마 이건 무슨 공룡이야?"

"모르겠는데"

"엄마 알잖아아아"

"아니 진짜 몰라(세상억울)"

"알잖아아아아아앜아앙!"

"하라야, 잘 들어. 엄마는 이날 이때까지 공룡이름이 궁금했던 적이 한번도 없어. 니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엄마는 티라노사우루스밖에 몰랐고, 니가 지금 알고 있는 공룡이름이 내가 아는 공룡이름의 전부라고. 엄마는 지구과학도 싫어하고 심지어 한국지리, 세계지리도 겁나 싫어해.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에 옛날에 뭐가 살았는지 왜 이제 없는지 하나도 안 궁금하다고"

" ....아아아아아앍아앙앍려줘!!!!"

이런 식으로는 거절의 말이 아무리 길어져봤자 쓸 데가 없다. 이래선 그냥 성의있게 성질내는 엄마일 뿐.


상황 3.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아이와 기침소리가 무서운 엄마.

"엄마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기침하는데 아이스크림은 뭐언 아이스크림이여."

"아이스크림 먹고싶다고~~~~~"

"안돼. 다음에."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먹고 기침 심해지면 병원가서 입원해야 돼. 주사맞고 입원할래?"

"주사 안 맞고 입원 안 하고 아이스크림만 먹을꺼야 이이이이읽이이이"

막무가내인 5세와 5세보다 논리적인 척하는 30대가 싸우고 있다.


엄마도 모르는 게 있고 해줄 수 없는 게 있고 하기 싫은 것도 있다는 것을 아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사실을 아이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아이가 자존심 상하지 않고 물러설 수 있도록 엄마가 먼저 한발 물러나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거절은 길게, 최대한 성의있게, 충분한 설명을 곁들인다.


상황 2.

"엄마 이건 무슨 공룡이야?"

"글쎄 그 공룡은 엄마도 잘 모르겠네."

"엄마 알잖아아아"

"엇 진짜 모르는데, 근데 입모양이 트리케라톱스 닮았네!"

"그럼 얘 이름은 뭔데?"

"엄마가 기억해놓을게. 입모양이 트리케라톱스 닮았고 타조처럼 생긴 공룡, 이따가 찾아보자."


상황 3.

"엄마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그래. 아이스크림 먹은 지 오래됐다 그치."

"응! 오래됐어."

"근데 하라가 지금 기침이 심해서 어쩌지?"

"아아아 괜찮아. 기침해도 괜찮아!"

"오늘 아이스크림을 이만큼 먹으면 밤에 자다가 기침이 계속 나와서 토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아니야, 토 안 해. 아이스크림 사주라 엄마, 제발제발요."

"그러면 이렇게 하자. 막대기에 붙은 아이스크림 말고 통에 든 아이스크림 사자."

"왜? 난 막대기 붙은 게 좋은데."

"막대기에 붙은 건 한번 뜯으면 다 먹어야 하잖아. 통에 든 아이스크림 사 가서 덜어먹자. 오늘은 조금만 덜어서 먹고 기침 다 나으면 그땐 더 많이 먹게 해줄게. 대신 하라가 좋아하는 맛으로 사자. 이리 와서 봐봐. 무슨 맛 좋아해?

"이거! 녹차맛!"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아이 대신 엄마가 물러서면 싸움이 줄어든다. 처음엔 어렵지만 자꾸 연습하고 반복하면

이 대화가 익숙해진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와도, 당장 쫓아가서 머리끄덩이부터 잡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뒤돌아서서 조용히 욕을 뱉을지언정 아이 앞에서는 일관된 표정과 숙련된 말투로 <성의있는 거절>이 가능해진다. 단련이 되는 것이다.




엄마의 일이란 결국 모든 것이 <마음 읽어주기>다.

먹는 욕구 채워주기.

관찰하고 들어주기.

거절 대신 제안하기.

상황에 따른 표현만 다를 뿐 모두 <마음 읽어주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섯살부터 일곱살까지, 3년을 꼬박 <마음 읽어주기>에 집중했다. 여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여섯살이 된 아이는 별일 없이 여섯살을 마치는가 싶더니 별안간 일곱살 때, 유치원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가 걸려오게 했다.


"어머니, 아이에게는 공교육이 적합치 않아요. 홈스쿨링을 시켜보는 건 어떠세요?"


일곱살 후반. 유치원 원장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학부모가 몇이나 될까? 결국 우리는 학교입학을 6개월 남겨두고 유치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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