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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탈출: 임상시험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

by 임혜영
병원 앞 나무에 홀로 앉아있던 새

나는 임상시험에 지원한 경험 때문인지 어쩌다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기관에서 잠시 일을 하게 되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 그래서 과거 순간순간을 되짚어보면 현재가 이해되기도 한다.


임상시험에 참여하려고 했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때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편두통 치료를 한 지 대략 6개월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하고 1종 보통 면허를 신청했다. 자전거도 타지 못하는 내가 트럭을 몰고 나갔으니 학원 입구에서 시동이 꺼지거나 학원 화단 위를 넘어가서 운전 연수 선생님에게 온갖 핀잔과 구박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면허를 따던 시기에 6시간의 도로 주행 시간을 채우면 합격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운전면허를 땄다. 그렇게 낮에는 운전 연습을, 밤에는 10시까지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온종일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집에 왔는데 발목에 작은 피멍이 들어있었다. 처음에는 발목에서 보이던 것이 며칠이 지나니까 멍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서 빨간색 점이 온 다리에 흩뿌려져 있는 상태였다. 고춧가루를 뿌린 것 같은 빨간색 점들이 시간이 지나니 노르스름하게 번져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하니까 발진이 올라왔나 보다 했다. 특별히 통증도 없었고 그냥 요즘 바쁘게 살고 있으니 시간이 가면 사라지겠지 했다. 그런데 내 무심함에 반항이라도 하듯 반점이 하반신을 넘어서 허리춤까지 올라왔고 손가락 끝마디부터 비슷한 반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증상이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난 후 피부과에 갔다. 다리 상태를 보여준 순간 의사 선생님은 왜 이제 왔냐고 했다. 언제부터 그랬냐는 말에 3개월 전이라고 말하니 이제 만성이 된 상태에 왔다고 독한 약이란 약은 다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냐면서 안타까워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게 뭔데요?”

“하지 말란 것은 되게 많고 먹을 약은 많은데 되게 안 나아지는 병이야 혈관염.”

이렇게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별명을 가진 내게 병명이 하나 더 추가되는 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있던 부정맥과 편두통은 어쩌다 나에게 찾아온 병으로 생각했는데 혈관염이란 병은 내가 잘 못 살아서 생긴 병 같았다. 아픈 몸이 정상적으로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쉬지 않고 잠을 줄여가면서 살던 것, 흉통이 있다는 핑계로 잘 먹지 않았던 것이 모여 생전 처음 본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피부과 선생님은 교과서를 펼쳐서 나와 같은 환자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관리 안 하고 약 안 먹고 치료 안 받으면 이렇게 된단다.”

다리 전체에 빽빽하게 뒤덮은 빨간색 점들, 징그럽다는 말이 저절로 나와서 인상이 써지는 사진이었다. 다른 증상은 없냐는 질문에 그동안 미심쩍은 증상들을 하나둘 속사포처럼 털어놓았다.

“뭔가 목도 감기 걸린 것처럼 아프고, 어쩔 땐 몸살 걸린 것처럼 몸이 아프고, 춥고, 반점이 난 부위가 처음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쑤시듯 아프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게 다 혈관염의 증상이야”라는 대답을 들었다. 휴학도 권유했다. 많이 걷거나 앉아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한동안 쉬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 안 가면 우울증에 걸릴 거라고 대답하고 나왔다.


쉬라는 말에 더더욱 청개구리 같은 심보로 다음 학년 때는 여름 계절학기를 신청했다. 진통제를 한 움큼씩 집어 먹고 학교에 가서 9시부터 6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한 계절학기가 아닌 조기졸업을 목표로 한 수강 신청이었다. 나는 그때 심장 시술 이후 2년간 회복이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내 인생이 뒤쳐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빨리 원래의 속도로 뒤쳐짐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다. 2년을 허비했지만 학교에 1년 빨리 들어갔으니 대학을 1년만 빨리 조기 졸업하면 모든 타임라인이 정상으로 될 것이라는 강박. 그러나 조기 졸업의 목표는 학교가 방학 때 전공 수업을 개설하지 않아서 좌절되었다. 휴학 없이 4년 바로 졸업하는 것으로 나와의 합의를 끝냈다. 누가 강요한 적도 누가 나에게 대학을 4년 만에 곧바로 마치지 않으면 죽일 거란 협박도 없었다. 스스로 결정해서 자신을 괴롭힌 것이었다.


혈관염을 치료하기 위해서 오전에는 류마티스 내과, 오후에는 편두통 치료를 위한 신경과, 가끔 피부 상태를 보기 위해 피부과, 심장은 잘 있는지 가는 심장내과를 누비며 이 약 저 약 먹었다.

“아파요 진통제가 안 들어요” 하는 내 말에

“진통제 3주 이상은 안 돼요, 아직 젊은데 스테로이드도 안 돼요” 혈관염을 치료해주시는 의사 선생님은 세상 단호했다.

왜 나아지지 않냐는 내 물음에

“그건 저도 모릅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약을 많이 안 쓰면 나는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리 아픈 것이냐"라고 물으면

“그럴 수 있다”라는 대답으로 항상 모든 질문의 답 끝에는 스테로이드는 안 된다는 대답으로 끝났다. 그리고 젊으니 아직 자가 회복력의 힘을 믿는 눈치였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약을 쓰지 않았는데도 좋아지는 경우가 있으니 지켜보자고 했다.


시무룩해져서 신경과에 가면 신경과 선생님은 내가 아프다는 증상에 맞추어 모든 진통제를 골고루 처방해주셨다. 그리고 내가 문을 나설 땐 “자기는 왜 여기저기 다 아프니 아직 젊은데...”하면서 나름 본인도 치료가 잘 안 되는 환자를 보며 속상하다는 표현을 했다. 나는 “그러게요 허허” 하고 나온다. 다음에 가면 그 약도 별 신통한 효과를 보지 못한 상태로 망연자실해하는 나를 보고 결심을 한 얼굴로 물었다. “마음이 아픈 건 아닐까?”


그날 병원 문을 나서면서 거울을 보았다. 몇 달간 먹은 약 때문에 살이 쪄서 당최 사람 같지 않았다. 좋게 표현하자면 보름달같이 둥근 얼굴이었다. 집에 와서 혼자 가만히 약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약을 버리자 병원에서도 더해줄 것이 없다. 증상도 약을 먹을 때나 안 먹을 때나 별 차이도 없다. 약을 끊었다. 그리고 별 차이 없다는 것은 내 착각임을 깨달았다. 약은 나름의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약을 먹지 않으니 옷을 걸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옷이 스치는 것도 아플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다. 며칠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다시 약을 먹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렇게 사경을 헤매다 10일 정도가 지났다. 출석을 위해 학교를 나갔지만 성적표에는 농번기 씨 뿌리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씨쁠 비쁠 비제로 가끔 에이쁠. 조기 졸업을 위해 높게 유지한 성적이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약을 끊고 천천히 살이 빠지고 있었다. 그 후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라 쓰고 누워서 몸 풀다 오는 요가를 하기 시작했다. 진통제는 가끔 먹었다. 운동을 하고 학교 수업을 조금 줄이고 성적을 포기하면서 조급한 마음을 살짝 내려놓았다. 평생 지도교수님 면담 시간 "졸업하면 무얼 할 계획이니?"라고 묻는 말에 철없고 생각 없이 노는 사람처럼 “교수님 그냥 졸업이 목표예요”라고 대답했다.


약을 끊고 쉬었더니 서서히 반점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통증이 언제 심한지 혈관염과 편두통이 어떻게 나를 괴롭히는지 4년 정도 지나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했던 피검사는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했다. 좋아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재발하지 않는 시간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재발하더라도 단기간 약을 강하게 쓴다면 그 전처럼 급속도로 번지는 일을 없을 거란 긍정적인 답도 듣게 되었다.


첫 번째 탈출

그렇게 편두통과 혈관염 사이를 오가며 보낸 대학생활이 끝이 나고 대학원생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번 대학원생 생활에는 편두통과 혈관염의 조합이 아닌 편두통과 메니에르 조합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질병 수집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혈관염도 과로해서 온 것이었다면 메니에르도 비슷하게 찾아왔다. 뜻대로 되지 않는 대학원 생활과 어떻게든 그것을 열심히 메워보겠다는 의지가 새로운 괴물을 만들었다.


대학생 때 내 집착은 시간이었다면 대학원생 때 내 집착은 심장이었다. 이제 나를 평생 괴롭힌 심장이란 녀석을 모두 파악해서 더 이상 괴로운 상태를 겪지 않아도 될 약을 만들어보겠다는 말도 안 되게 큰 꿈이 있었다. 현실은 맨날 병원에 가서 약을 먹는 주제에 약을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남이 보기에도 허무맹랑한 꿈이었다. 의대나 치대나 한의대에 간 공부 잘하는 내 학창 시절 친구들이 말했다.

“네가 약을 만들거나 의사가 되기 전에 네가 아파서 죽을 수 있어~"

"그 길이 얼마나 힘든데 건강한 우리도 죽을 것같이 힘들어 그냥 편하게 살아"

"누가 너에게 아무도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잖아 쉬엄쉬엄 해”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 말은 일리가 있어 그래도 그냥 살 수는 없잖아 해보는데 까지 해 볼래” 하고 내 갈 길을 갔다. 이런 마이 웨이 정신으로 앞만 보고 가던 내게 또 메니에르가 나타나 발목을 잡았다.


입원해도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판되는 약은 모두 먹었다. 한 병에 20만 원이 넘는 비보험 약까지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럼 시판되지 않는 약을 먹어봐야지 하고 서울에서 진행하는 임상시험에 참여하기 위해서 병원에 연락했다.

“저 거기 내원하는 환자인데요 제 병록 번호는 000000이고요 공고 난 0000 약 임상시험에 참여하고 싶어서 전화했습니다.”


예약일에 맞추어 임상시험 센터에 갔다. 가는 길 내내 엄마는 “나는 네가 임상시험 안 했으면 좋겠다. 이 약이 성공해서 시판되길 기다려보자 나는 네가 이걸 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하셨지만 나는 엄마에게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라서 엄마 동의는 필요 없다. 나는 할 거다 나는 결심을 했다.” 하고 갔다. 동의서에 사인하기 전에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모든 과정을 설명 들었다. 전화로도 계속 설명 들었고 내가 위약군에 투여되어서 진짜 치료제를 투여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알고 있었다. 부작용 설명도 모두 들었다. 나는 그때 양잿물이라고 해도 마실 기세였다. 관련 논문과 그 전 임상시험 단계에서 보인 결과 모두 읽고 온 상태였다. 뼛속까지 이과형인 나는 수치들이 말해주고 있는 결과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한국에서만 아직 승인이 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었다. 그럼 나는 기다리지 않고 빨리 그 약을 받아서 하루라도 빨리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혈액 채취를 한다며 채취할 혈액을 담은 튜브들을 가져와서 보여준 순간. 엄마는 기겁하셨다. 나와는 다르게 감성이 더 큰 엄마는 대충 보아도 10개는 되어 보이는 검체 튜브들을 보고 이만큼을 다 뽑아야 하는 것인지 물었다. 그때 그 간호사는 감성적이고 심적으로 힘든 환자 보호자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생각 없이 내뱉고 말았다. 철저히 계산적이고도 과학적인 대답. “하루에 400 mL 정도 피를 뽑아도 아무 문제없어요. 헌혈하는 양보다 적어요. 그리고 이 약이 신약인데 다른 약들과 달라서인지 혈액 채취를 유독 많이 해요. 우리도 놀라긴 했지만 더 이상 다른 약도 듣지 않고 어쩔 도리가 없지 않나요? 이 약만 남은 것인데... 건강한 성인은 몇 시간이면 다시 혈액이 만들어져요”


나는 이미 동의서에 내 이름을 적어두었는데 엄마는 동의서를 던져버렸다. '아... 저 말을 저 간호사는 왜 했을까' 했다. 더 이상 다른 약이 듣지 않아서 아무 약이나(아무 약은 아니지만 임상시험 단계이니 보호자 입장에서는 미심쩍은 약) 내 자식에게 먹이고 피를 저렇게 많이 뽑아가도 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건강한 성인이라는 말에 엄마는 화가 났다. 심장으로 어릴 때부터 고생해서 겨우 살려둔 자식인데 체격 조건만 보고 겉은 멀쩡하니 피를 뽑아도 금방 생길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거슬렸던 것이다.


엄마는 나에 관한 세세한 정보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나는 아파서 밥 한 끼 먹고 두유나 과일 하나로 대강 끼니를 때우며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약을 먹어 살이 찐 상태이지 음식을 많이 먹어서 찐 살이 아니었다. 잘 먹고 건강한 사람들이나 피가 하루 만에 잘 생기지 예전에는 빈혈도 있었던 아인데 멋대로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 아픈 환자에게 건강한 성인 기준을 들먹인다며 역정을 내셨다. 그리고 내 딸이 아플 뿐이지 이 약을 먹지 않으면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마치 내일모레 죽을 사람들이 더 이상 쓸 약이 없으니 아직 안전하지도 않은 약을 허실 삼아 써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 태도에 기분이 나쁘다며 동의서를 던지고 나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화가 난 엄마와 당황한 간호사 사이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일단 우리 엄마에게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으니 다시 주치의에게 데려다 달라 말했다. 임상시험센터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 연결된 복도에서 엄마와 나는 원수지간처럼 말싸움했다.

엄마는 “네가 죽을병도 아닌데 왜 죽을병 걸린 사람들처럼 다 포기한 것처럼 임상시험을 하려고 하냐!”

나는 “죽을병이 아니지만 죽을 것처럼 아프니 다른 선택은 안 보인다”하며 항변했다.

그럼 뭐하나 나는 엄마가 울면 그대로 독해진 마음이 풀어져서 엄마 하자는 대로 엄마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 버리고 마는데... 결국 임상시험을 취소했다. 의사에게 가서 조금 더 생각하고 나중에 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의사에게 엄마의 걱정과 우려와 기분 나쁨을 말했다. 나는 그만하라는 눈빛으로 엄마를 째려보았다.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안 한다고 했으면 그만 좀 울어” 나도 화가 난 것이다.


나와 엄마와는 반대로 의사는 웃고 있었다. 의사는 익숙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방송에 여러 번 출연해서 편두통을 직접 겪은 신경과 의사로 이름이 알려져서 나도 이미 의사에 대한 신뢰는 있는 상태였다. 내 의료 기록을 보고 아직 안 먹은 약이 하나 있긴 하다고 했다. 약이 좀 강한 편이라서 아마 처방을 안 한 것 같은데 이 약을 마지막으로 먹어보지 않겠냐고 했다. 분명 처음 먹을 때는 효과가 전혀 없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계속 먹어보라고 했다. 본인도 먹은 약인데 이것이 제일 효과가 좋다고 했다. 이 약과 함께 다른 약한 진통제를 같이 먹으라고 했다. 보통 진통제 하나도 강하기 때문에 하나만 주는데 내 경우는 약이 듣지 않으니 같이 먹으라고 했다. 그냥 아픈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참지 말고 바로 먹으라는 말도 당부했다.


나는 약을 받아서 다시 집에 왔다. 엄마랑은 집에 돌아오는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옆에서 울고 있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안 했다. 엄마는 계속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먼 산만 바라보았다. 오는 길에서 약을 먹고 집에 와서도 약을 먹었다. 통증은 계속 있었기에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일 먹었다. 효과는 없고 가슴이 조이듯 아프기만 했다. 그런 약이었다. 그런데 한 달 정도를 먹고 나니 살짝 차도가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서서히 상태가 나아져서 나는 대학원을 졸업했다.


괜찮은 상태는 아니었다.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운 상태이니 길 가다가 넘어져서 이마를 다쳐 피가 나고, 계단을 오르다 넘어져서 무릎을 다치고 우당탕탕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임상시험과 약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타이레놀이나 이부 프로펜 정도의 진통제를 먹으면 그나마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물론 타이레놀을 하루에 6알씩 집어먹어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사긴 했지만 간은 멀쩡했다.


두 번째 탈출

지긋지긋한 메니에르도 편두통도 어느 정도 잠잠해질 무렵 졸업 논문 심사가 끝나고 이제 나는 정말 잠시 쉬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1월 겨울날이었다. 쉬겠다는 사람치고는 영어 공부하겠다고 오전에 두 시간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노느니 염불 한다고 영어 공부를 놀면서 하지 뭐 하고 있었다. 2월이면 졸업이라서 몸담았던 학교 일도 서서히 마무리하며 대학원에 출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도교수님께서 나를 불렀다.


“너 혹시 졸업하고 갈 곳을 정했거나 계획이 있니? 서울 가고 싶어 했었잖아 박사 과정 하러 서울 갈 거니?”

나는 대학생 때 한번 대답했던 그 철없는 대답 실력을 발휘했다.

“계획은 없고요 쉴 건데요, 쉬는 게 계획이에요”

내 대답에 교수님은 상당히 당혹스러움과 어이없음과 살짝 실망한 표정을 동시에 그 짧은 순간에 표현하셨다. 그러다 다시 마음을 다잡으신 것 같았다. 내가 허송세월을 보내지 못하게 할 결심.


그렇게 나는 놀 거야! 쉴 거야! 소리를 한 달간 외치고 다닌 것이 무색하게 대학원과의 계약이 끝나자마자 3월에 취직해서 근로계약서를 쓰게 되었다. 약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다 만든 약을 사람에게 시험하는 과정을 보러 갔다. 그 과정 속에서 문득 임상시험 대상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임상시험을 하려고 했을 때 느낀 감정과 임상시험을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4개월 만에 내 발로 그곳을 나왔다. 그 후 임상시험에 관한 연구를 하기 위해 두 번째 직장에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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