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여름을 지나는 동안 나는 조금 쓸쓸했고 조금 더 깊어졌습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새벽이면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며 잠시 먼 숲속 안개 덮인 나무 사이를 떠도는 작은 새를 떠올립니다. 가을은 안개 사이를 떠도는 새의 울음처럼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나무들이 메마르는 계절입니다. 나무가 마르는 만큼 과실은 단단해지고, 그러는 사이 나무는 어느새 고요해진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을 겁니다.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지면 나무는 침묵의 세계를 향해 점점 더 고개를 숙입니다. 침묵은 심장을 향해 파고들고 침묵의 끝은 길고 질긴 뿌리를 내립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묵념, 떠나는 것들에 대한 추모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하루 24시간,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운명적으로 눈빛을 마주하며 보낸 10분이 따분한 교수의 지루한 강의를 들은 10분과 다르듯, 아름다운 음악을 듣는 한 시간과 일을 하는 한 시간이 다르듯, 시간은 모두에게 다르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을도 그러하겠지요.
오래전 마음에 새겨두었던 시가 떠오릅니다.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것은 조지훈 시인이 쓴 ‘낙화’입니다. 꽃이 지는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꽃을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은 내 마음 때문입니다. 떠나보내야 할 때를 안다는 것, 그것은 시간의 끝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꽃이 없는 세상의 황폐함을 이미 알고 있기에 시인은 아침을 맞으며 또 그렇게 울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이 시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입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가야할 때는 아직 우리에게 축복을 빌어줄 힘이 남아있을 때이며 돌아서서 기억할 사랑이 남아있을 때입니다. 우리의 인연이 비루해지는 것 역시 그 때문입니다. 비루함은 연연함에서 비롯되고 연연함은 집착으로 이어지게 되니까요.
미래는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이 정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탈주와 접속, 그것은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일이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문득 가을이 다가오고 지금 어디에선가 가야할 때를 느끼는 사람은 가던 걸음을 돌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 사람의 뒷모습을, 그 사람의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을, 그 사람의 등에 드리운 그늘을, 그 사람의 내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당신이 떠나고, 내가 떠나고,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어딘가에서 또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아무래도…, 올 가을은 유난히 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