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갑니다. 팔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있고, 등이 굽은 사람도 있고, 들을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겉으로 보이는 불편함은 없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입니다.
한때는 겉으로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외진 곳에 가두고 눈에 띄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폭력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이제 점점 깨닫고 있습니다. 보이는 모습이 다를 뿐, 그것은 결코 틀리거나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이 비장애인의 평균에 맞춰 설계되고, 그에 맞게 규칙들이 정해지면서 장애인들은 설 자리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이 비장애인들만 살아가는 것이라는 편파적이고 왜곡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생명들에게는 그 나름대로 존재의 이유가 있고 그 누구도 그 존재에 대해 비하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소외시킬 권리가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우연은 누구도 피해가지 않는다는 대원칙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우연의 사고에 휘말릴 수 있으며 꼭 사고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세상은 처음부터 불편한 사람들의 시각에 맞춰 설계되는 것이 훨씬 미래를 생각하는 설계일 수 있습니다.
하다못해 건물의 구조만 해도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가 그런 처지에 놓인다고 해도 불편 없이 함께 살아갈 수 미래형 설계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한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너희 나라에는 장애인이 없나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거리에 장애인이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만큼 장애인이 돌아다니기엔 불편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작은 계단 하나도 몸이 불편한 이들에게는 큰 장애가 될 수 있으니까요.
중학교 때 존경하던 담임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체육을 전공하신 분이셨는데 어느 날 큰 사고로 하체가 마비되셨고 그 이후부터는 줄곧 휠체어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을 찾다가 우연히 연락이 닿아 그분을 만난 후 놀람과 당혹스러움에 눈물을 흘렸지만 그분은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애를 얻고 보니 그동안 못 보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이지요.
불편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무심히 넘기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무심함이 결국엔 우리 모두의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 청인과 농인이 수화로 대화하는 세상, 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 장애인을 위한 비장애인의 노력이 결코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엔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는 세상, 그런 세상을 이제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